캐리 Carrie (1976) by 멧가비


내가 생각하는 좋은 호러란 불특정 다수에게 무개성하게 어필하는 깜짝 쇼 같은 게 아니라, 특정 대상에게 최적화된 특정한 유형의 공포를, 통배권처럼 내장까지 사정없이 쑤셔넣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보편적인 연애의 경험이 있는 남성에게, 특히 무력했던 어느 순간들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좋은 호러다.


영화는 고교생 캐리의 늦은 초경으로 문을 연다. 내가 알고 있는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프롤로그 중 하나다. 그리고 피칠갑을 한 캐리의 재앙적인 신경질로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사정없이 조진다. 피에서 피로 끝나는 아찔한 수미쌍관. 즉 주인공 캐리는 어떤 면에서는 월경 그 자체를 의인화한 인물이다. 적어도, 평생 가도 그 격통을 직접 체험할 수 없으며 피와 신경질이라는 표면적인 "현상"만을 목격할 수 밖에 없는 남자들에겐 그러할 것이다.


세상 가장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것만 같던 그녀가 어느 날 별안간 내 전생의 죄를 심판하러 온 염라대왕처럼 검은 아우라를 등에 지고 나타난, 그 기세에 세상 겁은 다 집어먹은 것 같은 "매우 보편적인" 남자들의 뼈 아픈 기억. 아뿔싸 그 날이 그 날이었던 거지. 이 때 잘 대처하는 남자는 연애력 상승하는 거고, 삐끗하면 영영 멍텅구리처럼 사는 거고.


초봄에 아직 덜 녹은 고드름인 것 같기도 하고 흔들어 제낀 콜라 캔인 것도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 폭발물 전문가 조차도 어느 선을 자르면 가라앉을지 알 수 없는, 조만간 모든 걸 망쳐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운 상태. 그것이 연애 초보 남성들이 겪곤 하는 여성의 호러블 매직 데이.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그것을 겪는 여자 본인의 고통과는 다른 성질의) 남자가 느낄 수 있는 월경의 공포다.
 




연출 브라이언 드 팔마
각본 로렌스 D. 코언
원작 스티븐 킹 (동명 소설, 1974)

핑백

  • 멧가비 : 해바라기 (2006) 2019-07-12 14:04:27 #

    ... 될 수 있을 거라고, 아주 쓸 데 없는 생각을 하곤 한다. 막상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딱히 말 할 거리가 없는 영화이기도 한데, 한 줄로 요약하자면, "드 팔마의 [캐리]를 아주 인상깊게 본 사람이 만든 가족 멜로 느와르 퓨전 괴작" 쯤 될 수 있겠다. 아닌 게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캐리]하고 흐름이 똑같다. 어딘가 어눌 ... more

덧글

  • 파란 콜라 2019/07/13 17:10 #

    최근에 나온거는 팝적인 공포였는데 예전 캐리는 이질적인 공포를 선사했죠
  • 멧가비 2019/10/12 15:54 #

    팝적인 공포..리메이크 안 보는 게 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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