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2019) by 멧가비


기택 가족은 다단계 판매 업자들처럼 서로를 엮어 가며 남의 저택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일확천금의 욕망 까지는 아니었겠으나, 뚜렷한 목적의식이나 구체적인 야망 없이 불쑥 시작한 계획이라는 점에서는 더 나을 것도 없다. 그런 어리석음 역시 자본주의의 폐단이요, 하고 영화는 얄밉게 너스레 떤다. 이쯤에서 문득 드는 생각, 약자가 곧 선인은 아니고 가난하다고 무조건 동정 받아 마땅한 것도 아니다.


발단은 이러하다. 수석(壽石)이 집에 들어온다. 귀인이 찾아들 듯 어느 날 뜬금없이 말이다. 그러나 산수경석이니 온갖 해몽을 갖다 붙여도 돌은 그냥 돌이지. 하이스트 무비 방불케 하는 절륜한 협잡으로 상류층의 집을 점거해도 하류층은 그냥 하류층이다. 상류층들은 누가 선 넘어오는 걸 싫어하고 하류층은 그걸 결국 못 넘는다. 그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계급이 나뉘는 자본주의 사회 현대판 계급제의 실체다. 아닌 척 하면서 살 뿐이지 그거 못 바꾼다.


행인의 오줌발이 훤히 보이는 집에 살고, 그나마의 집도 잃어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같은 마룻바닥에서 잠이 든다. 단지 비가 왔기 때문이다. 비가 쏟아지면 반지하 가족은 역류하는 똥물을 뒤집어 써 가면서 삶과 씨름해야 하지만, 저택의 남자는 고작해아 쿰쿰한 가난의 냄새 조금에 불쾌해 한다. 자본주의라는 것의 모순이 그렇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취하고 노동자는 임금을 취한다.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 받는 거래에서 필연적으로 갑과 을이라는 계급이 발생한다. 돈은 귀하고 노동은 남아 돌기 때문이다.


그 뻔하디 뻔한, 공부 젬병인 중학생도 형 누나들 낡은 옷 몇 벌 물려입다 보면 자연스레 체득하게 되는 성가신 경제 감옥의 구태의연한 비극을, 봉준호는 자기 화법으로 돌려서 썰 푼다. 능글맞게 빙 돌지만 뼈에는 사무친다. 칠방팔방으로 지랄 땐스를 춰도 결국 포수 글러브에 정확히 때려박히는 마구처럼 말이다. 그가 그의 영화들에서 늘 써먹던 연출 푸티지들을 재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간의 봉준호 월드를 벗어나 새로운 영역으로 향하는 듯 보인다. 동서양의 B급 영화들을 긁어모아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완성한 타란티노의 [킬 빌] 이상으로 창조적인 우라까이라 하겠다. 한국인의 감수성을 갖지 아니하여도 이해할만한 뚜렷한 장르화법으로 진행되며, 비참할지언정 찝찝하진 않다. 뭣보다, 강아지나 여고생이 죽지 않는다.





연출 봉준호
각본 봉준호, 한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