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쟁호투 Enter the Dragon (1973) by 멧가비


이소룡이 주연한 첫 미국 영화. 그래서일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주인공 리는 그의 다른 어떤 영화들의 캐릭터보다도 서구인들이 기억하는 "브루스 리"의 구도자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다. 파라마운트에서 제작한 71년작 TV 시리즈 [롱 스트리트(Long Street)]에서 그가 연기했던 "충 리"의 모습과 가장 흡사하다는 점에서는 ([그린 호넷]을 제외하면) 그가 "브루스 리"로서의 경력을 미국에서 시작한 시점, 즉 원점회귀의 의미도 일부 본작에 있다 하겠다. 


이소룡 영화들은 문화적 아이콘으로서의 이소룡 본인을 빼고 나면 영화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사실상 할 말이 그다지 없다. 이소룡 영화들에는 이소룡이 자랑하는 보디빌딩 근육과 절권도 동작, 그리고 그것을 맘껏 과시할 명분으로서의 기초적인 시나리오가 있을 뿐이다. 모든 대사와 미장센, 배우 등이 이소룡이라는 하나의 아이콘을 빛내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이소룡의 몇 안 되는 영화들이 모두 그러하지만 이건 그 중에서도 특히나 과시적이다. 그리고 호평이든 혹평이든 유일하게 뭔가 할 얘기가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물리적으로 가장 과시적인 영화는 [맹룡과강]이다. 척 노리스의 패배로 유명한 그 콜로세움 시퀀스. 늘 갑빠 자랑에 여념이 없던 소룡이 형은 그 전설적인 맞짱 씬에 앞서 기나긴 스트레칭을 선보이신다. 이소룡이 자신의 출연작들을 일종의 교보재처럼 생각하는 측면이 있었다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해당 스트레칭 동작은 이소룡의 삶을 다룬 미국 영화 [드래곤]에서 오마주 된다.)


그리고 이 영화에 이르러서는 물리적인 과시를 지나 그가 늘 말하고 다녔다던 절권도에 대한 철학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도입부에서 홍금보를 늘씬하게 패 준 후 왠 꼬마를 쥐어 박으며 선문답을 시작하는데, 사실 정석적으로 보면 존나 쓸 데 없는 장면이 굳이 편집으로 쳐내지 않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웃기게도 그 장면의 연기가 제일 좋다. 그도 그럴 게, 그 씬에서만큼은 캐릭터인 '리'가 아니라 '브루스 리' 본인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보면 이소룡 존나 힙합이었네.


그 장면 뿐 아니라, 다시 말하지만 정석적인 플롯 배열과는 거리가 먼, 파천황적이라 할지 아마추어적이라 해야할지 모르겠는 장면들이 허다하다. 영웅적 캐릭터를 다루는 보통의 창작물에는 공적인 플롯과 사적인 플롯이 혼재한다. 이 영화에서 이소룡의 경우엔, 공적인 플롯은 한에 대해 조사하라는 임무이고 사적인 플롯은 오하라에 대한 복수일테지. 그리고 보통이라면 클라이막스는 복수일 터다.


그런데 이 영화는 어째서인지 영화 중간 쯤 복수가 선행되고 끝판왕이 임무의 타겟이다. 드라마를 더 폭발시킬 수 있는 파트가 먼저 끝나버리니 뒷 부분이 약할 수 밖에. 게다가 복수의 상대는 시정잡배에 지나지 않고, 누가 봐도 끝판왕 급의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볼로는 엉뚱한 백인 주연이 상대한다. 이쯤되면 누가 주인공인지도 헷갈린다. 러닝타임 짧은 격투 영화에 최초 주인공이 셋이나 되는데 그들이 협력관계도 아닌 그냥 따로국밥. 그렇게 이야기는 분산되고 구조는 허술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은 거울방 시퀀스이며 이소룡과 동등한 위치로 시작했던 백인, 흑인 주연 배우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짐 켈리는 이 영화 이후 70년대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쿵푸 액션 스타였는데도! 


시류에 맞게 '007'풍 첩보물에 이른바 'Chopsaki' 장르를 이종교배한 점은 이색적이고, 뭣보다 도입부 홍금보와의 대련 장면은 현대적인 MMA의 기초를 한 발 앞서 스크린에 소개한 의미있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저예산의 퀄리티나 인물들의 연기력 등 여러가지 요소들을 배제하더라도, 헐리웃의 쿵푸 오리엔탈리즘 문화를 알리는 데에 이어 서구 문화권에서 아시안 남성이 활약할 수 있는 저변을 조금은 넓힌 것 등 상징적인 의미가 많은 영화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소룡 특유의 과묵한 Badass의 이미지가 서구인들에게 특히 어필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연출 로버트 클루즈
각본 마이클 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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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umic71 2020/12/31 15:46 #

    CIA와는 별도로 소림사를 배신한 자를 처단하라는 미션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소림사가 그런 성격의 조직이었는가는 논외로 하고.
  • 멧가비 2020/12/31 16:40 #

    본문 요약) 사적인 임무를 맨 뒤에 배치하던가, 라스트보스에게 존재감을 더 줬어야 한다
  • rumic71 2020/12/31 17:30 #

    맨 뒤로 보내기엔 오하라가 너무 피래미죠. 한은 빌런으로서의 존재감이 충분했습니다. 오히려 보스 치고 너무 직접 나선다는 느낌조차 있는걸요.
  • 멧가비 2020/12/31 17:56 #

    더 쉽게 요약) 전체적으로 각본이 형편없다.

    본문에 다 쓴 얘기를 댓글로 자꾸 요약하려니까 성가시네요. 본문을 잘 읽고 댓글을 달아주시면 좋을텐데..
  • rumic71 2020/12/31 18:47 #

    잘 읽고 보완하는 것인데요.
  • 멧가비 2020/12/31 22:09 #

    거절합니다. 각자 주관적으로 감상하는 거지 본인이 기준도 아니신데 뭔 보완이니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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