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 빌 Kill Bill (2003, 2004) by 멧가비


다른 영화들에서 카피해 온 요소들로 장편 영화 하나가 구성되는 건 새삼 신기할 일도 아니지만 널리 알려진 수법이라고도 할 수 없다.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등 대단히 새로운 무언가로 평가 받은 영화들에 사실은 오리지널리티가 얼마나 없는지를 얘기해주면 다들 놀라듯이 말이다.


타란티노의 짜깁기 영화는 그러한 점에서 다르다면 다르다.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이 사실은 [용호풍운]의 플롯 카피라는 점을 당당히 밝혔던 것처럼, 그는 늘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자신의 경험과 리스펙트에 대해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작품관이 그의 도발적인 태도와는 달리 늘 다른 작품들에의 존경으로 가득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저 몇 개의 요소들을 카피해왔다는 점만으로 자신의 영화가 평가절하 받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타란티노가 어떤 요소를 차용해오든 늘 관객은 늘 그것을 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타란티노의 영화로 인식한다. 일종의 콜라주 영화라고 나는 부르는데, 감독-작가 자신의 스타일이나 작가주의가 전면에 내세워지고 레퍼런스들은 그저 흥미로운 장식에 불과하다면 이런 영화가 되는 것이요, 빌려온 요소들을 소거했을 때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그것을 "우라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예컨대, [매트릭스]의 레퍼런스 중 하나인 [공각기동대]가 감춰지듯 스며들어 있는 것과는 다르게, 이 영화에서는 외부에서 온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툭툭 튄다. 금발 백인 암살자가 카타나를 휘두르고 호학권을 구사하는데 이게 다른 데서 가져 온 장면이라는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영화 편력만 조금 받쳐준다면 영화 보는 내내 레퍼런스의 출처를 찾아내는 게임을 해도 될 지경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타란티노와 관객이 경쟁인듯 협력도 하는 하나의 게임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래서 이 영화가 한창 핫할 당시에는 영화로 방귀 좀 뀐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레퍼런스를 찾아내어 공개하는 게 잠깐 유행하기도 했다.


창작자에게 있어 보통의 경우는 자신의 재주가 부족할 때 타인의 것을 빌려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타란티노에게 있어서는 그 조차 예외이다. 홍콩 쇼브라더스 무협이나 일본 찬바라 복수극, 세르조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 등은 워낙에 결이 통하는 면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여기에 유럽 포르노와 특촬물의 요소까지 서슴없이 참여시키는 것은, 그렇게 해서도 영화를 조잡하거나 뻔하지 않게, 자신만의 쿨한 독립적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다는 자기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제임스 캐머런은 "불 타는 로봇"을 자신의 꿈에서 봤다며 끝내 [이색지대]와의, 혹은 유압 프레셔에 깔린 괴물에 대해 [플라이]와의 연관성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 단 하나의 레퍼런스도 인정하지 않는 대감독의 자존심에 비하면 타란티노는 적어도 시시하게 굴진 않지.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각본 쿠엔틴 타란티노, 우마 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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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AGA 2021/02/05 23:50 #

    여러 요소가 마구잡이로 뒤섞여있으면서도 영화가 뭔가 세련된 맛이 있죠. 킬빌의 후속편 찍는다고 했던 거 같은데...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궁금해지네요^^
  • 멧가비 2021/02/06 14:45 #

    엎어졌다는 공식 발표만 없었지 지금에 와선 아무도 기대 안 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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