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호 (2021) by 멧가비


기술력 그 자체를 중요하게 다루는 하드 SF가 아닌 이상, SF는 이야기의 전달 방식이자 배경이지 장르 그 자체가 아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형사 누아르고 [터미네이터]는 슬래셔, [쥬라기공원]은 탈출한 괴수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봉준호의 [괴물]과 [설국열차]이 각각 가족 멜로와 계급 투쟁에 관한 이야기라면 [별에서 온 그대]는 트렌디한 로맨스다. 이 영화와 가장 결이 가까운 [스타워즈]는 기사, 공주, 마왕이 나오는 고전적 무용담에 웨스턴과 찬바라를 섞은 것. SF도 결국은 이야기가 9할이다.


[스타워즈]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40년이 더 된 작품이고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서브컬처적 장르를 실사 영화판에서 '진지하게 논의 가능한' 대상으로 승격시킨 주역. 해당 장르에 대한 인식은 지금보다 더 안 좋았고, 심지어 모두가 망할 것으로 예상한 저주 받은 저예산 영화였다. 그런 악조건에서 조지 루카스는, 마왕으로부터 공주를 구해내는 기사의 이야기에 대담하게도 웨스턴과 일본 찬바라, 나찌 제국을 혼합하고 당시로선 생소했을 "포스" 즉, 기(氣)라는 동양적인 소재로 포인트를 준다. 유치한 우주 통속극은 그렇게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서 우주 활극을 만든 그 시절의 루카스에게도 있던 대담함이 이 영화엔 없다. 티나게 조급하다. 확신이 없으니 가진 모든 걸 때려 붓는다. 양극화 사회, 가족을 잃은 전직 프로페셔널의 애수, [가오갤]을 명백히 의식한 팀 코미디, 누가 처음 꺼냈는지도 모르겠을 만큼 수 없이 봐 온 '초능력 꼬마' 보호하기 플롯, 테러리스트로 오해 받는 사실은 휴머니스트 집단, 선민의식의 악당 등등. 혹시 모를 후속작을 위한 안배 없이 전부 다 때려 부으니 진행이 난잡하다. 이 영화만의 "이야기"가 뭔지 모르겠다.


한국에는 여태껏 SF 액션 활극의 진득한 역사가 없었고, 때문에 감독이나 배우가 기댈 만한 적당한 톤의 기준이 없다. 그래서인가, 배우들 연기가 어딘가 붕 뜨고 안절부절 못 하는 듯 보인다. "우리 지금 우주에 있다"는 걸 지나치게 의식하고들 있다. 확신이 없는 채로 떠는 톤으로는 아무리 재미있는 대사를 주고 받아도 그저 소음이다. 유해진은 대사의 내용 보다 톤이 더 중요한 배우인데, 대사는 물리고 심지어 사운드 조차 엉망이다. 아역의 연기가 오히려 가장 보기 편한 건 장르에 대한 편견과 불안감 없이, 그냥 배운대로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국 CG가 이 정도라니 놀랍다"든가 하는 감탄이 존나 의미 없는 게, [괴물]이나 [디 워] 때도 이미 CG는 헐리웃 수준이었다. 대낮에 괴수들이 깽판치는 건 헐리웃에서도 쫄아서 잘 안 하는 거거든. CG 팍팍 쓰라고 투자 받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한국 영화가 기술이 모자라진 않는다. CG는 이제 돈과 적당한 시간만 있으면 한계 없이 쓸 수 있을 정도로 임계점에 달한 거의 공공재에 가까운 기술인데, 모두가 같은 수준의 기술을 구사할 수 있다면 미학에서 성패가 갈리는 거지. 이 영화의 미학적 야망은 "아 SF구나"하고 인식시키는 수준에서 멈춘다. [스타워즈]나 [에일리언], [제5원소] 등은 특유의 미술적 뉘앙스 덕분에 지나가는 장면 아무 거나 스틸을 찍어도 그 영화의 쇼트인 줄 알 수 있다. 이 영화로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이동진 평론가가 '몰개성의 작법'이라는 단어를 썼던데, 작법도 작법이지만 나는 미술 부분에서 그 말이 와 닿더라. 아니 일단 그 지긋지긋한 드레드 펌 부터 그만합시다.


전형적인 [블레이드 러너] 풍의 네온사인 퓨처 레트로리즘을 90년대 한국 재래시장의 축축하고 복작복작한 느낌으로 재해석한 저자거리 장면 등은 좋다. SF라고 무리해서 쿨한 척 안 하고 '삼촌' 등의 생활감 있는 호칭이나 현대적인 소품 등을 쓴 부분들 특히 좋다. 뻔뻔하게 똥 싸고 방귀나 껴 대는 꽃님이 캐릭터가 재미있어서 "나노 소녀 꽃님이 우주 대모험" 같은 시리즈로 따로 떼어서 보고싶을 지경이다. 전체적인 구조는 나쁜데 부분 부분 좋은 것들의 합이 영화의 절반 가까이는 된다. 편집이나 음악이 늘어지지만 연출 자체나 액션 구성 등은 무난하다. 한국에서 쿨한(척 하는) SF 액션 영화 하나가 나왔다고 해서 호들갑 떨 것도, 괜히 가산점을 줄 이유도 없지만 준수한 기성품 SF 액션 영화 하나로서는 평가절하할 필요도 없겠다.


[내추럴 시티] 이후 한국에서 보기 힘들던 본격 SF 액션 활극 장르. 척박한 텃밭에 새싹 하나 자란, 용기 있는 한 걸음이다. 그 정도의 의의는 충분히 있다. 인류의 목숨을 거론하는 전형적인 헐리웃식 거창한 영웅담에서 잘 아는 배우들이 한국어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 역시 매력적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호감과 실질적인 수준은 별개의 이야기인 거고. 의의와 도전 정신만으로 명작이 될 거면 영화과 대학생들의 자주 단편은 전부 다 깐느 가야지.







연출 각본 조성희


-------

이 영화 까면 매국노 되는 분위기가 또 슬슬 생기던데, [디 워]때 처럼 존나 백분토론 까지 쓸데없는 논쟁을 끌고가는 추태로는 안 번졌으면 좋겠다



덧글

  • 나인테일 2021/02/08 22:54 #

    레트로 퓨처리즘에 주제는 잡다한거 다 갖다넣고 갈피를 못 잡는게 꼭 사이버펑크 2077이 생각나더군요.
  • 멧가비 2021/02/10 15:33 #

    그거 기대작이었는데 그것도 그런가요..
  • Shishioh 2021/02/08 23:16 #

    덤으로 송준기가 연기를 못합니..
  • 멧가비 2021/02/10 15:36 #

    다행히 큰 기대 없었습니다ㅎ
  • SAGA 2021/02/09 22:51 #

    디워 같은 국뽕 거하게 들이킨 사람들이 폭주를 일으키는 사태는 없었으면 하네요... 당시 디워 재미없다고 깠다가 여러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있네요...
  • 멧가비 2021/02/10 15:39 #

    그런 우스운 논쟁이 티비로 까지 옮겨갔다는게 히트였죠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