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Zack Snyder's Justice League (2021) by 멧가비


거두절미 한 마디로 요약, 호박에 줄을 그었더니 수박 비슷한 것이 됐다!! DC 확장 세계관이라는 말라 비틀어진 청과물 시장에서 보기 드물던 과즙상이 드디어 나타났다고.


가장 먼저 고민해보게 된 지점. 조스 위든의 실력은 어디까지가 진짜배기고 어디까지가 운빨이었던가. [어벤저스] 1, 2편이야 "케빈 파이기 빨 받으면 누구나 그 정도 뽑는다"는 말 까지 나올 정도니 차치하고,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는 내가 몇 편 안 봤으니 그렇다고 치는데. [파이어플라이]도 설마 운빨이었던 걸까. 위든의 프로듀싱 실력이 아니라 개별 에피소드 감독들이 잘 했던 거였나 아니면 그 때 다 쏟아내고 하얗게 불태운 걸까. 아니 이 양반, 각광 받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퇴물 신세냐고.


더 놀라운 건, 극장판이 그 모냥이었던 건 잭 스나이더 하차 이후 조스 위든이 각본을 전부 다 뜯어 고친 결과물이었더라는 비화. 아니 더 정확히는, 워너라는 대형 스튜디오의 고용 감독에게 그 정도의 권한이 주어졌었다는 점이다. [어벤저스]의 성공이 워너로 하여금 위든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고 거기서 위든이 자만한 건지, 아니면 원래 워너는 애초부터 어느 정도 감독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건지,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배트맨과 로빈] 때의 조엘 슈마허와 똑같은 입장은 확실히 아니었던 것 같다.


대부분 편집으로 날라간 분량들만을 다시 주워담았을 뿐인데 아예 다른 영화가 됐더라 하는 평은 나 말고도 다들 하는 얘기니까 관두고. 분명히 위든 판과 스나이더 판 양쪽 모두 있는 장면인데도 영화 전체의 분위기만으로 해당 씬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게 포인트. 배리가 브루스한테, 당신 초능력은 뭐냐 물을 때 브루스가 "부자인 거"라고 대답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위든 판은 시종 말 같잖은 대사들만 한 바가지 쏟아지는 아사리판이라 저 조크도 그 짜증나는 헛소리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전반적으로 톤이 정리되어 있는 스나이더 판에서는 괴물 같은 초능력자들을 스카웃 하고 있는 일반인의 자조적인 너스레처럼 들려서 신기하다. '몽타주'는 쇼트만이 아니라 대사에도 해당되는 거였네. 쿨레쇼프, 당신의 위대한 발견을 새삼 칭송한다!


그러니까 이 스나이더 판 제1의 미덕이라는 것은 바로 그 배트맨의 캐릭터를, 내가 아는 원래의 그 배트맨에 최대한 가깝게 되돌려 놨다는 점이다. "사이보그가 진 주인공"이라는 평 많던데, 아니 내게는 배트맨이 여전히 으뜸 주인공이고, 이 영화는 결국 배트맨의 리더쉽과 하드보일드로 정의 내려진다. 영화 속 마더박스 탈환전을 대함에 있어서, 원더우먼과 아쿠아맨은 각각 그들의 종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배트맨은 그렇지 않다. 세간에서 차지하는 명성과 입지를 생각하면 외계 행성인인 슈퍼맨이 오히려 지구를 대표한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플래시-배리 앨런은 [시빌 워]에서의 스파이더맨처럼 겁 없이 참전한 소년병일 뿐이고, 사이보그에게 있어서 사건은 개인 성장담이다. 즉, 배트맨만이 아무런 개인적 동기가 없으며 (제임스 고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배트맨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그런 배트맨이 팀 결성의 주축이 되고, 가장 약한데도 가장 선두에서 목숨 건 특공을 감행하는데 이게 어떻게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극장판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조롱당했던 배트맨의 하드보일드를 재평가 해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 이 스나이더 컷이라는 버전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내러티브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스나이더라는 이름의 사이키델릭"이라 요약하겠다. 스나이더 슬로 모션 밀당 연출을 원래부터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만한 데카당스 아편굴이 또 따로 없다. 취하고 뿅 가는 거지.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랄까.



앞서 호박에 줄 그었더니 수박 "비슷한" 것이 됐다고 했다. 수박이면 수박이지 어째서 비슷한 것이란 말인가. 스나이더의 성의 있는 연출과 진지한 태도에 힘입어 영화는 [맨 오브 스틸] 이후 이어진 DC 확장 세계관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멋진 영화로 환골탈태 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포함되어 있는 "기획" 측면에서는 여전히 실패다. 아쿠아맨과 사이보그 등 2군 주연들의 개인 서사는 다시 생각해도 이 영화에서 다루지 않았어야 하는 것들이다. 내러티브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씬들이 켜켜이 쌓여 네 시간, 스트리밍으로 서비스 될 때나 가능한 러닝타임이다. 처음부터 스나이더 버전으로 극장에 걸렸더라면 그 쪽 역시 두 시간 남짓이었을텐데, 그게 지금의 이 버전만큼 근사할 수 있었을지는 그 누구도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이 영화의 유일한 좆같은 점. 아예 마음에서 버렸던 DC 확장 세계관에 다시 또 뭔가 기대하게 만들었다는 것. 이 만큼들만 하시오 내 기꺼이 호구가 되겠으니.






연출 잭 스나이더
각본 잭 스나이더, 크리스 테리오

덧글

  • 듀얼콜렉터 2021/03/24 16:03 #

    전 극장판은 정말 지루하게 봤는데 잭스나판은 4시간동안 의외로 몰입하고 볼수있었네요, 확실히 보강되긴 했지만 그래도 잭 스나이더가 남아있었어도 배댓슈 같이 저스티스리그도 2시간 극장판 나오고 이후에 감독판을 낸 행보와 같았을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이번같은 평가를 받지 않았을것 같구요.

    며칠전에 워너브라더스의 미디어관련 고위관계자의 인터뷰가 나왔는데 우린 잭 스나이더가 그의 트릴로지를 만들 기회를 준게 기쁘지만 이후엔 스나이더 관련 작품이 나오지는 않을것이다고 선을 그었는데 잭 스나이더는 제작사가 원한다면 돌아오지 못할것도 없지 않느냐 같은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어서 향후에 DCEU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 멧가비 2021/03/24 18:12 #

    감독한테 다 뒤집어 씌우고 꼬리 자르는 짓거리는 여전하군요
  • SAGA 2021/03/29 00:01 #

    조스 위든의 저스티스 리그는 진짜 지루하게 봤는데, 스나이더 버전은 꽤 재미있게 봤네요. 위든 버전이 저스티스 리그를 어벤져스에 억지로 끼워넣은 듯한 내 영광이여 다시 한 번! 이란 느낌이었다면 스나이더 버전은 DC는 이렇게 가야지~! 란 느낌이랄까요...

    후속작이 나와줬으면 하는데... 아무래도 어렵겠죠...
  • 멧가비 2021/03/31 00:53 #

    후속작이야 어쨌든 나오겠죠. 문제는 위든판이랑 스나이더판 어느 쪽 세계관을 정사로 치고 이어가냐일텐데...
  • 더카니지 2021/03/29 11:31 #

    구판이 6억 달러 흥행이었는데 이 버전이 2시간 40분~3시간 컷으로 개봉했다면 충분히 10억 달러 흥행이 가능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 멧가비 2021/03/31 00:58 #

    문제는, 워너가 3시간 남짓짜리 버전을 그대로 극장에 걸었겠냐 하는 거겠죠. 그 감 없는 인간들이 과연...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