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 V (1983 - 1984) by 멧가비


누가 쓴 어떤 작품의 리뷰도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3자적인 관점으로 평가하는 게 특별히 어려운 작품들이 있다. 주로 뿌연 유년기의 기억에 각인처럼 남아있는 작품들에 대해서 그럴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드라마가 그 중 하나인데, 아주 어린 시절이라 뭔가를 느끼고 생각할 틈도 없이, 마치 원숭이가 인간의 TV를 눈으로 보면서 기계적으로 뇌에 기억만 하듯 그렇게 무의식 깊숙한 곳에 기억을 남긴 드라마다.


하지만 유년기에 접하게 되는 그런 보통의 픽션들과 달리, 이 드라마에 한해서만큼은 추억이 실체를 부풀리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단지 추억의 드라마, 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필요도 없이 충분한 걸작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달리 실제로는 미니 시리즈 2부작, 그리고 후속 3부작으로 구성된 짧은 시리즈다. 물론 인기에 편승해 부랴부랴 만들어진 19화 분량의 시리즈가 더 있지만, 약간 사골 우려내는 기획이라 주요 배역들도 대거 이탈하고 퀄리티도 쳐지는 면이 있다. 그래서 '브이' 하면 내게는 그냥 딱 5부작.


2부작으로 구성된 '오리지널 미니시리즈'는 "우방"을 가장하고 온 파충류 외계인 선단이 우호적인 방식으로 지구 사회에 침투한 후 서서히 파쇼의 본 얼굴을 드러내고 이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가 결성되는 과정, 그리고 1년 후 후속으로 방영된 '최후의 전투' 3부작은 레지스탕스가 어떻게 외계인 파쇼를 밀어내고 자유를 되찾는지에 대한 대단원을 그리고 있다. 거의 드라마 시작부터 아돌프 히틀러와 나찌당의 집권을 노골적으로 풍자한다. 시민의 지지, 하겐크로이츠, 인체 실험, 프로파간다, 히틀러 소년단, 마타도어 흑색선전 등의 소재가 우회적이랄 것도 없이 거의 직격타로 은유되고 있다. 침략자 내부의 비둘기파와 지구인 부역자 등 파쇼 체제 하의 군상과 파시즘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변화 등이 상당히 디테일하게 묘사되는 점도 인상깊은 부분.


어쩌면 제작 국가인 미국의 입장에서는 당시 냉전 체제 하에서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겠으나, 오히려 직접적인 피침략의 역사를 겪은 한국에서 오히려 더 시사하는 바가 컸을지 모르겠다. 하필 또 극중 침략자들의 메인 컬러가 채도 높은 붉은색이다. 당시 브이 열풍에 동네 담벼락마다 실제로 빨간 V자 낙서가 가득했던 것 또한, 당시 우리나라 군사독재정권이 거의 세뇌 수준으로 시행했던 반공 교육과 아예 무관하진 않았을 것이다.



[스타워즈]의 인기에 어느 정도 편승한 기획인 점은 주지의 사실일텐데, TV쇼라는 제작 여건상 볼거리가 화려한 스페이스 오페라 드라마를 뚝딱 찍어낼 수는 없으니 세계관은 지구로 한정하고 대신 텍스트에 더 공을 들인 기획이진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SF 등 화려한 볼거리의 장르 픽션이 부족했던 시기에, 대충 [우뢰매] 정도의 수준만 돼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데 이 드라마는 21세기 이후 현재에 와서 다시 감상하더라도 부족함 없을 기술적 퀄리티와 촌스럽지 않은 미술에 돋보인다. 미국 대도시 상공에 거대한 모함이 마치 감시자처럼 떠 있는 광경은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과도 같았고, 미녀 배우가 기니피그를 산채로 삼키는 모습이라던가 가짜 얼굴이 벗겨지고 파충류 피부가 드러나는 장면은 당시 많은 시청자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작중 미성년자인 인물의 외계인 태아 낙태 장면 까지도 여러모로 충격적이었고.


[스타워즈]의 아류로서 한계가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포스'라는 마법이 없는 세계관의 절박한 액션은 훨씬 박진감이 넘치고, 당시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침략-저항전이라 스릴러로서의 장르 쾌감 또한 뛰어나다. 마이크 도노반, 줄리엣, 햄 타일러 등 주역들의 영웅담 뿐 아니라 잡역부로 잠입해있는 레지스탕스 소속 노인의 의거까지도 자세하게 다뤄주는 등 단순히 SF 붐에 편승하지만은 않는 내러티브는, 현실적인 반 파시스트 드라마였던 최초 기획의 흔적일 것이다.


물론 온갖 추억의 장면들이 차고 넘치지만 내 또래 당시 소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장면은 다이애나가 줄리엣을 세뇌 시키는 씬이겠지 아무래도. 극장 가면 레이아 공주가 황금 비키니를 입고 있고, 집에 와서 TV를 틀면 줄리엣이 살색 전신 타이즈를 입고 있던, 아아 우리 세대의 몽정기는 늘 SF와 함께였다.






연출 각본 케네스 존슨

덧글

  • 듀얼콜렉터 2021/03/24 15:53 #

    전 오히려 그 파충류 아기가 태어나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진짜 그 당시 방영할때보고 무서워서 잠을 잘수가 없었네요...
  • 멧가비 2021/03/24 18:11 #

    생각나버렸네요.....
  • 블랙하트 2021/03/24 22:11 #

    여기서도 황금 비키니(?)가 나왔었죠. (엄밀히 따지자면 속옷 이지만)
  • 멧가비 2021/04/03 16:22 #

    19부작에 나왔었나요?
  • 블랙하트 2021/04/03 16:53 #

    미니 시리즈 2부작이었는지 후속 3부작이었느지 기억은 안나는데 여성 외계인이 도노반을 도망치게 해주면서 자기 옷을 벗어주어 속옷 차림이 되는 장면이 나왔었죠.
  • SAGA 2021/03/29 00:30 #

    어렸을 때 레이저 총을 퓽퓽 쏴대는 걸 보고 열심히 봤던 기억이 있네요... 피부를 찢고 파충류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정말 질색이었지만 말이죠...
  • 멧가비 2021/03/31 00:57 #

    파충류 피부 나오는 장면은 지금 나와도 쇼킹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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