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라 VS. 콩 Godzilla VS. Kong (2021) by 멧가비


모든 괴수 영화의 원점 쯤으로 만신전에 오른 [킹콩]에서 콩이 알로 사우르스의 턱을 찢은 이래, 두발로 선 거대 영장류와 수각룡의 맞짱은 괴수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볼거리가 되어버렸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피터 잭슨 리메이크 [킹콩]에서도 그것만은 대원칙처럼 지켜졌고 그것만은 관객의 아드레날린을 즙처럼 뽑아냈다. 90년대 비디오 게임인 [프라이멀 레이지]도 애초에 거기에서 시작한 것 이고, 토호의 [고지라]로 계승된 괴수물의 역사는 일본판 킹콩, 일본판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로 이어져 [울트라맨]이라는, 오늘날 일본 서브컬처의 상징과도 같은 프랜차이즈를 낳기에 이른다. 그리고 다시 미국. 애초에 킹콩을 만든 나라에서 그 원초적인 볼거리로 원점회귀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으리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대괴수 영화를 만들 때 신경써야 할 건 크게 딱 세 개 뿐이다. 1. 괴수가 얼마나 근사한가, 2. 괴수가 극중 어떤 역할인가 (파괴자, 구원자, 병원체 등등) 그리고 3. A괴수가 B괴수를 싸워서 이기는 게 납득이 되는가. 차 포 다 떼고 이 세가지만 잘 지켜도 좋은 괴수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작 [킹 오브 몬스터]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인간이 많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아니다. 괴수 발생, 괴수 전쟁이라는 초월적인 현상을 자꾸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하고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무언가로 끌어내리려고 한다는 데에 진짜 문제가 있다. 그러니 인간이 병균이고 괴수는 지구의 의지니 어쩌니 하는 막연한 잠꼬대가 튀어 나오는 거지. 적당히 버스만한 괴수도 아니고, 본고장에서 '대괴수'라고 부르는 것들이 인간의 콘크리트 문명을 유린하는 영화라면 그냥 괴수들이 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되지, 자꾸 인간 기준으로 바라보지 말고 괴수가 왜 출현했느니, 괴수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니 그딴 거 고민하지 말자고 쫌. 애초에 롤랜드 애머리히 [고질라]부터가 그러다가 조진 거다. 대괴수 이야기를 인간 시점으로 자꾸 끌어내리는 게, 근본적으로 고질라에서 인간용 생리대로 임신 테스트한 거랑 똑같은 소리야.


이 영화가 잘한 게 그거다. 물론 여전히 인간이 많이 나오고 중간중간 흐름을 끊지만 괴수들이 맞짱 뜰 땐 그냥 괴수 레슬링이다. 
고지라가 얼마나 빡이 쳤는지, 콩이 얼마나 근성 있는지 딱 거기에만 몰입해서 볼 수 있게 판이 짜여져 있다. 하찮은 인간이 감 놔라 배 놔라 겐세이 놓질 않아. 도움 되고 싶으면 그나마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괴수 옆에서 미사일이나 딱콩딱콩 쏴주면 되는 거지. 인간들이 분수를 알면 괴수 영화가 보기 편해진다. 일본 괴수 영화가 애초에 그렇게 진화했거든. 괴수가 왜 존재해? 그런 걸 누가 궁금해 하냐 괴수는 그냥 거기 있는 거지. 괴수들이 인간이랑 어떤 관계를 형성하냐고? 그딴 거 고민했으면 지금의 고지라는 없었겠지. 고지라, 가메라, 고모라, 젯톤 등등 네임드 괴수들은 자고 싶으면 자고 일어나고 부수고 싶으면 일어나서 부순다. 괴수가 왜 화가 났는지, 왜 사람을 잡아먹는지보다 폼 나는 괴수가 얼마나 맛있게 도시를 찜쪄먹는지에만 집중하는 게 괴수 영화 강국의 괴수 영화들이다.


괴수물은 기본적으로 렘브란트의 사실주의 화풍보다 고흐의 표현주의에 가까운 장르다. 박진감 있는 전개와 그 순간 순간의 기세로 보는 거지, 뭘 자꾸 설명하려 들 필요가 없다. 괴수물 아닌 장르에서 예를 들어보자. [스타워즈]의 우주에서 외계인들이 영어로 얘기하는 이유를 누가 한 번이라도 설명하던가? [엑스맨] 시리즈의 미스틱이 월경 주기에 남자로 변신하면 어떻게 되는지가 감상에 꼭 필요한 질문인가? [드래곤볼]에서 오공 가족이 무슨 돈으로 먹고 사는지 설명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지나? 답은 뻔하지. 애초에 초거대 나방이 날라다니는 세계관인데 괴수들이 밟아도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걱정한다고? 그럴거면 이걸 왜 봐.


고질라와 콩을 헐리웃 기술로 21세기에 다시 맞붙인다는 기획이 공개됐을 때 부터 이미 대등한 싸움이 되지는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고지라는 수십 편의 영화를 거치며 대재해 그 자체로 격상된 반면 콩은 정글 아니면 뉴욕에서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닌 놈이잖아. 물론 여기에는 괴수를 바라보는 미국과 일본의 관점 차이도 영향을 미친다. 단지 자연의 변덕으로 조금 더 자랐을 뿐인 콩은 어떤 괴수와 괴현상도 과학의 힘으로 해석하고 통제 가능할 것이라는 미국식 사고방식에게 항상 패배했고, 유난히 많은 자연재해의 압도적인 공포에 늘 짓눌려 살아온 섬나라 사람들이 핵폭탄 까지 맞아버리면서 비틀려버린 자의식을 응집시켜 신전에 올린 것이 고지라 아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그런대로 근사하게 맞붙인 각본이 또 대단한 거다. 고지라는 정말 고지라처럼 싸우고 콩은 정말 콩처럼 싸운다. 두 괴수의 개성을 무시하지 않고 명백한 전력 차이를 알기 쉽게 묘사하면서도 또 실전은 엎치락뒷치락 하는 걸 설득력 있게 진행시키니 말이다. 누가봐도 열세인 콩이 손에 뭐 하나 쥐겠다는 예상은 누구나 했을테지만, 거기서 갑자기 스톰 브레이커를 들어? 여기서 전율.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소름 돋는다. 그러면서도 아이템을 만능 치트키처럼 남용하는 건 또 아니고. 아무튼 전반적으로 무리수를 두지 않은 각본이 주효했다.


인간 캐릭터 중에서는 월터 시먼스가 제일 흥미롭고 또 아쉽다. 생각해보면 딱히 악당도 아니고, 전형적인 미친과학자 포지션이지만 의외로 이 시리즈 통틀어서 제일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앞에서 이 영화의 좋은 점이 인간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을 자제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인간의 관점을 걷어내니까 본질이 보이잖아. 인류의 영웅이니 구원자니 추켜세웠던 고지라도 결국은 자존심 세고 성질 더러운 짐승일 뿐이었던 거지. 방법이 (잘못된 게 아니고) 미흡했을 뿐이지, 언제든지 눈깔 돌아서 달려들 수 있는 짐승한테 지구의 넘버원 자리를 내어주면 안된다는 게 인간 기준으로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다. 심지어 미취학 대상의 어린이 드라마에서도 인류의 자주성과 주체적 안보 만큼은 늘 주장하는데, [울트라맨] 시리즈의 오랜 테마가 바로 "인류는 인류 스스로의 힘으로 지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싸움은 늘 외계인인 울트라맨보다 인간의 방위대가 활약하게 스토리가 구성된다. 심지어 시리즈 가장 최신작인 [울트라맨 제트]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즈 최초로 괴수형 메카들이 괴수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였지. 시먼스는 그냥 가장 근본적인 원칙에 충실했을 뿐인데 악당처럼 최후를 맞았다.


플롯 상에서 딱 하나 아쉬운 점. 남극이 나오길래 거기서 2차전 붙을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안 생기더라. 극지방 특성상 변온동물인 고지라보다 정온동물인 콩이 조금은 유리했을테니 지형적 특성을 살린 설욕전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없음. 그래도 홍콩 전투가 아름다웠으니 만족스럽다. 하지만 씬이 재미있는 것과는 별개로, 홍콩이 초토화 되는 그림이 현실의 홍콩 상황과 맞물려서 참 여러가지 의미로 무섭더라. 중국 자본 존나 무섭다.





연출 애덤 윈가드
각본 에릭 피어슨, 맥스 보런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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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AGA 2021/04/03 00:22 #

    개인적으로 월터 시먼스 만큼이나 아쉬운 캐릭터가 세리자와 렌이었습니다. 무려 오구리 슌을 캐스팅 해놓고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날려버린 거 같았거든요...

    영화상에선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전작에서 고지라를 살리고 사망한 세리자와 박사의 아들 정도로 보이는데... 그가 고지라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설명했으면 좀 더 재미있는 영화가 됐을 법 했는데... 아쉬웠어요.

    쓸데없는 음모론이나 읊어대는 메디슨은 치워버리고 세리자와 렌의 스토리에 집중했어야 했는데...
  • 멧가비 2021/04/03 16:20 #

    MCU 영화에서 아사노 타다노부, 사나다 히로유키 같은 배우들이 맡았던 배역들을 생각해보니 여기서의 오구리 슌도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일본 네임드 배우들의 헐리웃에서의 위치가 어쩌다보니 그 정도 수준으로 고정돼버린게 아닌가 싶어요.
  • 잠본이 2021/08/05 19:05 #

    어찌보면 전작들의 와타나베 켄이 요상하게 비중이 높았던 것이죠(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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