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위도우 Black Widow (2021) by 멧가비


세뇌를 주요 소재로 차용한 유사 첩보물이라는 점에서 [윈터 솔저]와 견주어지는 건 이 영화의 태생적인 운명이다. 결이 같은 두 영화다. [윈터 솔저]에 대해 먼저 다시금 짚고 넘어가자면, 냉전시대 사회파 영화와도 같은 진지한 톤에 가면 쓴 괴인과 독수리 남자가 날뛰는, 냉탕과 열탕 신나게 뒤섞인 잡탕밥 영화였다. 이 영화? 주인공 나타샤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마치 선댄스 영화처럼 톤이 침잠되는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비밀조직 암살자들이 코스프레 같은 옷을 맞춰입고 대로변에서 쌈박질을 한다. 이건 누가 봐도 만화 원작 실사화다.


이 불협화음을 어찌 비난하랴.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슈퍼히어로 영화다. 초인들이 세상을 구한다는 거창한 명분으로 10년 넘게 유지되는 세계관의 또 한 꼭지다. 애초에 첩보 요원이라는 양반들이 자기네 회사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새겨진 밴을 타고 다니는 세계관인데, 그 정도의 과장성, 과시성이라는 것은 없으면 오히려 곤란한 하나의 장르 약속이다. "장르 단짠"인 셈이지. 그런 거 싫으면 "본 시리즈" 보면 되잖아. 로버트 레드포드 나오는 80년대 첩보 영화 보면 되지 왜 마블을 봐.



블랙 위도우, 나타샤는 어벤저스 원년 멤버들 (토르 제외) 모두의 어둠을 곁에서 위로해 준 인물이다. 토니 스타크가 팰리듐 중독으로 죽어가는 것을 캐치해 해독시켜 줬고, (공간이 아닌 시간으로서의) 고향을잃은 캡틴이 버키를 잃고 페기 마저 떠나보냈을 때 찾아와 안아줬다. 헐크를 배너로 되돌릴 수 있었고 헐크의 인격에 삼켜진 배너를 다시 깨워낼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였으며, 가족을 잃은 클린트에게 다시 희망을 준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나 나타샤의 어둠은 (적어도 영화 상에서는) 그들 중 그 누구도 발견해주지 못했다. 정확히는, 관객들에게 유독 나타샤의 어둠만은 철저히 감춰지고 늘 다음으로 미뤄져왔다. 모두의 어두운 순간을 함께 견뎌줬던 나타샤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어둠과 재회한 순간을, 쓸쓸하지만 충분히 따뜻하게 바라봐 준 가족 드라마, 라고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 내려도 될 것이다. 두 번째 가족이었던 어벤저스 멤버들 모두가 부재중일 때 일어난 일이지만, 철저히 스파이 같았던 나타샤라는 인물에 대한 진혼곡으로 이보다 더 좋은 플롯이 나오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정말 철저히 아무도 곁에 없다. 닉 퓨리나 클린트 정도는 게스트 출연할 수도 있지 않나 싶지만 정말 철저히 아무도 없다.)


다만 액션 영화로서는 다소 건성인 것 역시 사실이다. 쿠폰 열 개 찍어서 서비스로 받는 기본 치킨 같다. 다른 어떤 멤버들보다 맨 몸 격투 기술자인 나타샤의 유일한 단독 영화인데 그 맨 몸 액션 시퀀스 자체가 너무 적다. 메인 빌런 중 하나인 "태스크마스터"는 설정만 요란하고 지나치게 이른 시점에 피해자로 포지션 전환한다. [윈터 솔저]의 버키, [앤트맨 앤 와스프]의 고스트가 피해자 포지션을 겸임하면서도 영화 내내 주인공 일행을 괴롭혔던 것과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고편이나 대충이라도 공개된 줄거리를 전혀 접하지 않고 영화를 봤는데, 세상에 레이첼 와이스가 벌써 스칼렛 요한슨 엄마 역할을 맡을 나이가 된 건가 하고 기겁을 했다. 다행히 실제 나이차는 그 정도는 아니더라.


근본 설정이 무색하게도, 슈퍼 솔저 혈청은 대충 아무나 맞아도 선한 아이덴티티를 유지할 수 있는 캐주얼한 도핑 약처럼 묘사되고 있다.


플로렌스 퓨는 분명 매력있는 배우이긴 한데, 스칼렛 요한슨의 후계자를 소화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회의적이다. 






연출 케이트 쇼틀랜드
각본 에릭 피어슨, 돈 헥, 네드 벤슨, 잭 섀퍼

덧글

  • 잠본이 2021/08/05 19:09 #

    아무래도 진짜 절대악인 드레이코프에 집중하기 위해 태스크마스터에는 신경을 덜 쓴 느낌인데... 어벤저스 멤버들의 기술을 모조리 따라할 수 있다는 맛난 설정을 너무 살리지 못한게 아쉬웠습니다.
  • 멧가비 2021/08/23 05:02 #

    차라리 어벤저스 시리즈에 서브보스로 한 번 쯤 나와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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