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스 Eternals (2021) by 멧가비


피조물이 마을로 내려간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저주한다.또 하나의 근사한 "프랑켄슈타인 괴물" 이야기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설정이다. 캐릭터의 면면도 흥미롭다. 범우주적인 임무를 지닌 존재라는 에고와 인간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라는 아주 사소한 이드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킨고, 알츠하이머 환자 부부 멜로 드라마인 길가메시와 테나 이야기, 팅커벨 컴플렉스의 스프라이트 등. 불멸의 존재에게 누적된 필멸자의 자아 이야기를 깊게 파려면 팔 수도 있었을 것 같고, 그랬다면 정말 좋은 의미로서의 마블 같지 않은 영화가 되었을테지만, 예상대로 이 영화는 그런 것들에 진지하게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아쉽다. 아쉬워서 아이러니하다. 그동안의 마블 영화들이 쌓아 준 공적이 없었더라면 시도되지 못했을 법한 프로젝트인데, 바로 그 마블 영화의 한 피스이기 때문에 영화의 진짜 비전을 펼치지 못한 것이 말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마냥 가볍고 언제나의 캐주얼한 마블 같기만 하지는 않다. [블레이드 러너]라던가 [에이아이], [13층] 등의 좋은 SF 영화들에서 끊임없이 다뤄온 존재론의 고민을 마블이라는 세계관에서 가볍게나마 재해석해 보는 것은 예상치 못한 체험이다. 예시로 든 영화들 속 주인공들이 느끼고 표현한 "피조물"로서 존재적 자괴감 같은 정서를, 이 영화의 이터널들은 조금 더 직관적이고 친숙한 감정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신이 행해 온 모든 임무들이 완전한 자유의지가 아니라 주어진 프로그래밍대로라는 깨달음에서 오는 비참함과 무력함, 자신의 존재 이유가 주어진 미션을 부정하는 형태로 구성되어있다는 사실에서의 분노 같은 것들 말이다. 인간을 지키라고 해서 지켰고, 지키기 위해 인간을 사랑했는데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수호자가 아니라 단지 언젠가 잡아먹을 축산물을 지키는 목양견이었을 뿐이라는 자각, 그 순간의 표현이 꽤나 괜찮아서, 비슷한 테마를 다룬 좋은 작품들과 이 영화의 차이점을 만드는 구심점이 되어준다.


이터널들의 감정적 추락은 결국 기억에서 시작된다. 앞서 말했지만 테나의 기행은 인간의 알츠하이머를 은유하고 있는데, 설정 그대로의 '매드 위리'든 은유로서의 '알츠하이머'든 결국은 누적된 기억이 고장나는 것이다. 스프라이트가 괴로워하는 것은 수 세기를 쌓은 기억이 무색하게도 홀로설 수 없게 만드는 외모 때문이다. 파스토스가 꾸린 가정의 형태는 인류가 차별과 혐오로 고통받은 기억에 대한 일종의 수정주의이고, 이카리스의 마지막 선택도 결국은 사랑의 기억 때문이며, 킨고는 "기록"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어벤저스]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처럼 각자의 인생 어느 순간에 모여버린 팀이 아니라, 처음부터 팀으로 탄생했음에도 기억이라는 동일한 개념을 각자 다르게 받아들이고 각자 다른 선택을 하는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물론 더 재미있었을 수 있었지만 앞서 말한대로, 마블 시네마틱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는 딱 여기까지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클로이 자오의 비전과 마블 스튜디오의 비즈니스가 충돌만 하다가 불발탄으로 식어버린 결과물에 가깝다. 지적인 부분은 다 조금씩 건드리다 말아서 밍숭맹숭한데, 되려 분량 얼마 안 되는 액션은 기대보다 꽤 잘 찍었더라. 특히 이머전스 현장에서 벌이는 이터널들 끼리의 마지막 싸움은, 사실 [저스티스 리그]가 이렇게 했어야 했다, 할 수 있는 표본에 다름 아니다. 다만 마동석이 좀 걱정이다. 우주 괴물 아가리뺨따구를 찢어버리는 것 까지 봤는데, 이 다음 영화에서 다시 시정잡배들이나 건드리면 상대적으로 너무 약해보이지 않을까. 마동석에게서 존나 센 걸 빼면 뭐가 남을지.







연출 클로이 자오
각본 매튜 K. 퍼포, 라이언 퍼포


-------

스프라이트가 보여주려다 대충 얼버무린 그 고민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커스틴 던스트가 훨씬 더 좋은 연기력으로 훨씬 더 비극적으로 연기했던 그거다. 그 영화 보면 된다.



핑백

  • 멧가비 :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Spider-Man: No Way Home (2021) 2021-12-27 14:37:59 #

    ... 만 그걸 대충 메꿔도 술술 넘어가는 여느 때의 마블 영화들과 같다. 싫어하는 재료가 들어있는데도 술술 넘어가는 음식은 좋은 음식이지. [블랙 위도우], [샹치], [이터널스] 등 새로운 영화들이 줄줄이 페이즈4에 대한 기대치를 떨어뜨린 지금 시점에서, 여느 때와 같은 마블 영화라는 건 대단한 성취다. 반대로 말하면, 21세기 슈퍼 ... more

덧글

  • 듀얼콜렉터 2021/11/11 07:22 #

    미국에서는 평론가 평들이 너무 박해서 약간 염려하면서 봤는데 그래도 무난하게 재밌더라구요. 중간에 DC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은 좀 빵 터졌습니다~
  • 멧가비 2021/11/11 22:12 #

    마블 영화치고 유머가 너무 없다는 평도 있던데, 꼭 그렇지만도 않더군요
  • 더카니지 2021/11/15 15:35 #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아요. 어떤 분은 블로그에 리뷰하시길 조스 웨던판 저스티스 리그급에 영상미가 조금 좋아졌을 뿐이라고 혹평하시던...

    사실 이카리스는 아무리 봐도 작중 특수효과 및 액션이 DCEU 슈퍼맨 하위호환이던데 무슨 자신감으로 슈퍼맨 농담을 넣은건지 이해가 안 가더군요.

    문제의 히로시마 씬의 경우 최근 일본계 각본가가 그 씬을 넣은 의도를 밝히면서 많은 분들이 분노하고 있는 듯 합니다. https://twitter.com/mgfrxxk/status/1459698359342563332
  • 멧가비 2021/11/16 16:04 #

    히로시마 씬 건은..마블이 한국시장 포기할 셈인가 싶더군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