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쇼 Quiz Show (1994) by 멧가비


텔레비전 드라마와 극장 영화의 차이, 영화관은 결국 팝콘 장사가 본질이고 영화 앞에 광고도 붙이지만 어쨌든 관객은 영화 자체에 돈을 지불한다. 하지만 드라마, 아니 텔레비전의 모든 컨텐츠는 전적으로 기업 광고에 의해 지탱된다. TV쇼는 인문학에 정통한 평론가들이 너나없이 달라붙어 예술적 가치를 발굴해내지도, 컬트 팬들에 의해 유의미하게 재소비되지도 않는다. TV쇼 시청률이라는 것은 정확히는 광고가 노출된, 즉 기업이 지불한 광고료에 대한 "밥값"을 그 프로그램이 해냈냐 못했냐에 대한 지표에 다름 아니다.


TV는 ([네트워크]에서 신랄하게 지적되었듯이) 결국 광고를 붙여주는 기업이 지배하는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TV쇼의 모든 것은 사실은 광고주의 의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해도 된다. 신념있는 어떤 제작자나 프로듀서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걸 만들고 있다고, 주도적인 시청자는 자신이 보고 싶은 걸 보고 있다고, 들 각각 착각하고 있겠지만 어쨌거나 광고주가 만들어도 된다 허락하고 보여주겠다고 결정한 것만이 TV라는 무대에 오른다. 그것이 TV쇼의 본질이다. 이 영화가 폭로한 실제 사건에 따르면 퀴즈쇼라는 것도 시청자가 열광할 적당한 주인공에게 연승행진이라는 드라마를 부여하고, 그 앞뒤로 광고를 붙여 상품을 팔아먹는 수단에서 한 치도 다르지 않다. 결국 TV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CF 모델인 셈이다. 스폰서의 의향대로 모든 것이 짜여지는 판, 알고도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자본 카르텔, 인간도 거대한 산업의 부품이라는 메시지는 [모던타임즈] 이래 아직도 유효하고 지랄이다.


굿윈은 청렴하고 영민한 공무원이지만 그 단순한 본질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당초의 포부처럼 미디어와 자본의 결탁 하에 이뤄진 기만의 시스템을 끌어내리는, 대신에! 그 유착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던 몇몇 사람의 사회적 몰락이라는, 가장 원치 않는 결말만을 어이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주인공 찰리, 부친의 집에는 TV가 없다는 것이 그의 성장 배경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는 유복한 교육자 가문에서 태어나 지적 욕망을 남몰래 품은 인물. 욕망을 가진 자는 언제나 유혹에 빠진다. 찰리는 아쉬울 것 없는 인생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인정받고 싶은 건지 자신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퀴즈쇼 조작 계획에 가담한다. 찰리는 사실 답을 미리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이 아는데, 아버지와 가문의 명성을 따라잡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TV쇼라는 잘못된 루트를 택한 것.


그런 것 치고는 가문의 명예, 대학 교수라는 직업 등 너무 큰 판돈을 걸었다. 그의 아버지는 품위 있지만 본의 아니게 아들로 하여금 열등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차가운 면모도 가진 사람이다. 찰리의 내면에 숨은 어떠한 컴플렉스가 그의 혜안을 흐린 것이겠지. 찰리의 아버지는 이에 일침한다. "아는 문제의 답을 말한다고 돈을 준 게냐?, 꼭 인플레이션 같구나"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일에는 1과 0 뿐이다. 그러나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그 외에 다른 것이 더 있다고 스스로를 속인다. 대의를 위한 거짓말? "대부분"은 진실이라고? 성공적인 사기극은 수요와 공급이 맞아 떨어질 때 이뤄진다. 시청자들도 결국 예쁘게 포장된 챔피언을 원한 것이다.


TV쇼가 대중을 기만하는 게 어디 하루이틀 일인가. 현재의 코로나 정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요즘 TV쇼를 보면 "방역수칙 지킵니다" 자막만 띄워놓고, 연예인들 예닐곱명이 마스크도 없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곁들이 토크로 침까지 튀겨가며 밥을 먹는다. 그리고 그 앞에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스탭 수십명이 바글대겠지. 방역수칙 지킨다니까 지키나보다 하고 있는 거야 그냥...21세기 인터넷의 보급으로 시청자 개개인의 의견이 응집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고, 유투브나 OTT 등 TV의 대안 매체 등이 전성기를 맞이한 지금에 와서도, 형태가 어쨌든 소비자와 미디어 간 권력 불균형은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연출 로버트 레드포드
각본 폴 애터나시오
원작 리처드 N. 굿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