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 라이트 City Lights (1931) by 멧가비


도시의 위정자들은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동상 앞에서 자신들의 형편을 자축하지만 같은 프레임 안에서 떠돌이(The Tramp)는 등 대고 맘 편히 누워 잘 곳 하나 갖지 못한 채 도시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쫓겨난다. 높으신 분들이여, 당신들이 뻑적지근하게 자축하는 그 도시의 풍요는 대체 누굴 위한 것인지요. 떠돌이 혹은 부랑자라 불리우는 하나의 캐릭터로 수십년, 이제서야 드디어 떠돌이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이 영화는 첫 씬부터 문제 하나를 툭 던지고 시작한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채플린은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설립 이후, [황금광 시대]에 이어서 또 한 번 떠돌이 캐릭터와 함께 장편 영화로 돌아온다. 제목이 중요한 영화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떠돌이에게는 세 가지의 빛이 있다. "눈 먼 소녀"라는 마음의 빛, 하지만 정작 소녀는 빛을 볼 수 없기에 아이러니다. 두번째는 "백만장자 친구"라는 물질적인 빛. 빈민들로부터 비관 마저 빼앗아 가진 듯한 부자의 변덕스러운 호의는 결국 떠돌이가 원래 가졌던 유일한 것, "자유"마저 빼앗기게 만든다. 세번째 빛은 물리적인 빛,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떠돌이가 가진 전부를 바쳤던 사랑이 종착지는 결국 그의 뒤를 쫓는 경찰차의 헤드라이트 뿐이다. 그럴싸한 제목 그러나, 대공황시대 떠돌이에게 도시의 빛이란 아이러니이며 또 다른 착취이며 잔혹한 현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영화들이 늘 그랬듯이 채플린의 페이소스는 어쨌든 결국 희망으로 갈무리된다. 떠돌이의 희생을 딛고 빛을 볼 수 있게 된 소녀, 결국 떠돌이를 다시 만나게 되니, 그녀에게 도시의 빛은 떠돌이였다.


지금에 와선 회자되지 않는 단편들에서도 슬랩스틱과 함께 늘 로맨스와 페이소스를 잃지 않았던 채플린의 작가적 아이덴티티가 가장 만개한 황금기의 걸작. 이 이후부터는 시그니처였던 떠돌이 캐릭터를 조금씩 떠나보내고 있기 때문에, 떠돌이로 완성되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이야기의 최종 완성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채플린은 유성영화의 시대가 오는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한 것으로 유명하고, 그러나 오히려 대표적 걸작들은 유성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아이러니함으로도 많이 언급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마지막 무성영화인 이 작품에서 채플린은 말기의 걸작들 어느 작품에서도 보여주지 못한 표정을 영화 마지막에 보여준다. 이 영화를 사랑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를 사랑한 이유의 아주 큰 부분이 바로 그 표정이리라.





연출 각본 찰리 채플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