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 (2021) by 멧가비


방영 전 홍보단계에서부터 "가족을 넘어 국가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굉장히 강조했던 걸로 아는데, 그게 제대로 표현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다. 아니 기본적으로 캐릭터성 빌드업도 허술한데 캐치프레이즈를 살릴 겨를은 정말 없어보이던데. 당시 대선 정국과 맞물린 국내 정치 담론 때문에라도 어느 샌가 부터 조선 태종에 대한 재평가 및 이미지 재생산 분위기가 활발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명분있는 칼을 뽑는 결단력 있는 리더의 아이콘으로 조선 태종이 재발굴된 셈이었는데, 뭔가 되게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그 조선 태종에 대한 드라마 제작 소식이 전해지더라.


거두절미하면, 상당부분 실패다. 가족을 숙청하면서 까지 대국적인 결단을 내릴 때의 고뇌와 딜레마, 그런 거 원했단 말이지. 그렇게 까지 할 수 밖에 없게 상황으로 내몰린 군주의 비통함, 그런 거 없이 되게 결단을 쉽게 내려버리는 주상욱 태종을 볼 때 마다 대체 어떤 캐릭터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거다. 각본이 너무 게을렀고 무능했다. 드라마 초기에 "난 괴물이오" 어쩌고 했던 건, 앞으로 쉽게 쉽게 칼을 뽑겠다는 밑밥이었던 거지, 숙청 부분은 대충 넘어가겠다는 작가의 발언 같은 거였어.


조금 극단적으로 평가하자면, 이방원의 정신적 성장이 거의 묘사되지 않은 채 중요한 결정은 못 내리고 맨날 씩씩거리고 징징대기만 하더니 처가의 도움, 아내의 조언 등으로 왕권을 얻자마자 안면 싹 바꾸고 권위적으로 구는 것처럼 묘사됐다. 이러니 왕권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원경왕후야 말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데 부당하게 권력으로 찍어눌린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제대로 표현됐더라면, 이방원이 왕권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처가는 물질적인 부분만 도움을 줬으며, 권세를 휘두르려는 친정 식구들을 말리다가 도저히 안되겠는걸 느낀 원경왕후가 태종의 칼처분을 납득하는, 혹은 왕후마저도 친정에 등을 돌리고야 마는 식으로 묘사가 됐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태종 역시 왕후를 생각해서라도 끝까지 처가를 지키려 하지만 끝내 그것에 실패하고 마는 비통함을 표현했어야 하고. 그래야 충녕대군 이후로도 원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많은 자식들의 기록이 개연성을 얻는 거고, 임금님이 초라하게 별거 당해버리는 꼬락서니 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는 거였지. 현대극이 아닌데도 여성 캐릭터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카리스마를 몰아주려다 보니 정작 타이틀롤인 태종만 성격 파탄자처럼 그려지고 말았다. 원경왕후 RPG 갑옷 쳐 입고 나댈때부터 조짐이 안 좋더라고.


옛날 대하 사극이 좋았다는 말 들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요즘 배우들이 더 선명한 화질로 나오는 드라마를 당연히 더 선호하고 싶지. 그런데 자꾸 정통 사극을 표방하면서 나오는 드라마들이, 기계적으로 상황만 묘사하고 빨리 빨리 다음 사건으로 넘어갑시다, 하는 태도를 보이니까 옛날 사극이랑 비교를 하게 되는 거다. 아니 누가 역사적 사건을 몰라서 사극 보냐고. 그 사건들을 마주하는 역사적 인물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상상하고 싶으니까 사극 보는 건데, 제일 중요한 걸 휘뚜루마뚜루 하면 어쩝니까. 한다고 한 건데 그 모냥이었으면 그건 또 그거대로 문제인 거고.


얄궂은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재미있게 챙겨봤다는 점이다. 사극이라는 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배우 연기 맛으로 보는 비중이 아무래도 크다 보니까. 김영철 연기 여전히 절륜한데 그 전 드라마들보다 스탯 할당을 조금 덜 받았다. 정종 역 김명수, 이숙번 역 정태우 등 사극 베테랑들은 그냥 화면에 나오기만 해도 재미있다. 이 드라마에서 재발견된 배우는 단연 주상욱. 포스트 최수종이라는 느낌이다. 되게 중견기업 홍보실장 같던 마스크로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정통 사극 주인공에 찰떡같이 붙더라. 그렇다고 정말 최수종표 사극들처럼 정작 주인공은 개성없이 가운데에 앉아있기만 하는 용안(龍顔) 원툴 배우가 되면 안 될텐데.






연출 김형일, 심재현
각본 이정우

덧글

  • 잠본이 2022/05/10 15:54 #

    최수종은 이미 캐릭터를 넘어서서 특이점의 영역에 도달했던지라(의미불명)
  • 멧가비 2022/05/10 21:57 #

    확실히 전성기의 최수종은 사극과 물아일체였죠
  • 잠본이 2022/05/11 09:12 #

    오히려 현대극에만 오면 그림자가 옅어져버리는 부작용까지 덤으로 붙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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