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1993) by 멧가비


세상이 권태롭고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무심한 남자 필 코너스. 매년 똑같은 성촉절 행사를 또! 취재하기 위해 매년 똑같은 그 펑추토니를 또!! 방문해야 하는 현실이 짜증스럽고 눈치 없는 세인들이 밉다. 그러나 폭설에 막혀 예정에도 없던 1박을 펑추토니에서 보내는 순간, 어제와 같은 하루가 반복되기 시작. 그 돌발적인 기시감! 아이러니하다. 늘 같은 삶의 반복에 찌들었던 필에게 정말로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건 오히려 삶에 환기가 된다.


영화는 매일 같은 상황에 늘 다르게 리액션하는 필을 구경하는 궁극의 원맨쇼다. "내일이 없다"는 것은, 적어도 오늘 하루만은 온전히 내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루"라는 어트랙션에 대해 자유이용권을 끊은 필은 악동 짓도 해보고 일탈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이내 그 역시 권태로워진다. 그러나 자살시도조차 허락되지 않는, 지나치게 완벽한 하루.


열반에 들듯, 하루 동안 더 좋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성장 영화이자, 그 시절 가장 웃긴 남자였던 빌 머레이가 그 시절 가장 아름다웠던 여자 앤디 맥도웰을 꼬시는 과정을 지켜보는 관찰형 로맨스이기도 하다. 연애하는 영화는 통 안 보는 나에게조차 이 영화는 인생 영화.


하루 안에 갇힌 필 코너스처럼 영화 안에 갇혀 스무 번 넘게 봤을 때 쯤 문득 든 생각. 매일 같은 날이 반복되고, 사람들의 행동, 말, 날씨, 공기 모든 것이 반복된다. 그 와중에 혼자만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대로 사고하고 인지하는 필 코너스. 그렇다면 과연 이 남자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채 뫼비우스의 띠 안에 갇혀버린 이 남자는 삶이라는 것을 살고 있는 걸까. 변화도 없고 인과(因果)도 없고, 쉽게 말해 앞 뒤가 없는, 그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이런 '숨 쉬고 있을 뿐인' 시간이 이 남자에게 있어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이 반복 안에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는 하는가.


이 남자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이 남자는 죽어 있는가. 숨을 쉬고 피가 흐르는데도?



박한 시골 마을에 사는 선한 사람들도 좋고, 그 마을의 연중행사에 들뜬 분위기도 좋고, 삐딱한 남자가 사랑으로 변해간다는 테마도 좋고, 이런 저런 낭만적인 코드들이 만으로도 몇 번이고 만족스럽게 반복 관람 가능한 영화다. 필이 아침 여섯 시에 눈을 뜨면서 매일 듣는 음악, 소니 & 셰어의 'I Got You Babe'를 모닝콜로 쓰는 기분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은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리라.





연출, 각본 해럴드 래미스




좋은 대사.


'왜 아직 여기 있어요?'

'당신이 있으라고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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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코스모 2014/04/03 21:22 #

    멧가비님은 추천글마다 다 재밌어보여요
    신기한 재주를 갖고계셔..☆

    저도 아끼는 로맨스물이 하나 있지요
    엄청 유치하고 내용도 시덥잖지만 그 분위기나 느낌이나
    마무리까지 전부 맘에 들어요
    봐도 또 봐도 좋지요
    TV에서 종종 해주던 거라 새벽 2시까지 뜬눈으로 지새던 기억이 아련합니당

    이 영화이름도 킵해놨다가 찾아보겠어요 X)
  • 멧가비 2014/04/03 22:06 #

    추천글처럼 보였다니, 글 쓴 의도 이상을 해낸 기분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그 아끼는 로맨스물 제목은, 얘기해도 안 볼 것 같아서 안알랴주시는 건가요.
    재밌을 것 같으면 보긴 봅니다 일단. 보고나서 악평을 쓸지언정.
  • 2014/04/03 21:5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멧가비 2014/04/03 21:59 #

    산드라 블록 나오는 그건가요. 기차역 나오고?
    맞아 그거 재밌었습니다.
  • 코스모 2014/04/03 22:03 #

    맞아요ㅋㅋ 그 영화!
    후후 제 인생 로맨스영화의 탑이죠

    즐겁게 보셨다니 기쁘네용ㅋㅋ
  • 멧가비 2014/04/03 22:11 #

    생각난 김에 대여점에 있나 찾아봐야겠어요.
    아직 젊은 산드라 누나도 보고싶고.

    그러고보면 진짜 좋은 영화는 90년대에 다 나왔군요.
  • Sdam 2014/04/04 00:11 #

    이 영화는 멜로물로서도 좋아하지만 묘하게 SF물로서 더욱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삶....트라이앵글이나 곧 개봉할 엣지 오브 투모로우도 생각나게 하네요
  • 멧가비 2014/04/04 12:10 #

    타임 패러독스 자체를 조금만 더 진지하게 다뤘더라면 진짜로 SF 쪽으로 이름이 남았을지도 모르겠네요.
  • 코스모 2014/04/05 22:04 #

    후후 - 영화는 혹시 보셨나요 !
    전 이 영화를 드디어 봤습니다
    왜 좋아하시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됐죠 !
    (그 마음을 제대로 안단 말은 저도, 적어도 10번은 본 뒤에 해야 할 것 같구용)
    억지로 감동이나 눈물을 쥐어짜지 않는 점이 또 편했고요
    필 아저씨가 시간의 정체된 흐름에서 점점 진실되게 변해 가는 모습이 기억에 남네요 =)

    좋은 영화 소개해주셔서 고마워요
  • 멧가비 2014/04/06 13:18 #

    재밌게 보셨다니 저도 좋네요. 아마 겨울에 눈 오면 또 생각나고 보고싶어질 겁니다.

    말씀하신 그 영화, 저는 아직 못 봤습니다. 기억을 갱신할 겸 한 번쯤 보긴 봐야되는데, 요즘같은 날씨에 괜히 그런 영화 봤다간 미쳐버릴 것 같기도 하고, 심란하네요. X-(
  • 코스모 2014/04/06 20:37 #

    봄을 타시는가 봐용 -
    봄이 나빴네요 !
    가까운 데 사시면 언젠가 막걸리라도 한잔 하며 이런저런 덕 토크를 해 보고 싶은데 아쉽습니당

    그래도 언제 한 번 꼭 보심 좋겠어요 =)
    멧가비 님 리뷰를 기대합니다
  • 멧가비 2014/04/06 21:22 #

    덕 토크라, 덕 토크에 막걸리라. 그곳이 무릉도원일까요.

    DVD 소재를 확보했으니 조만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 코스모 2014/04/07 17:25 #

    무릉도원이죠 =)
    저는 잘 못 마시는 주제에 가리는 것도 많아서 
    막걸리에 탈 꿀이 필요합니다만 ㅋㅋ

    앗 그렇지
    제가 리뷰글을 기대했다고 해서 꼭 쓰시라 한 건 아니니 부담갖지 마세요i▼i
    귀찮으심 안 쓰셔도 괜찮습니당
    나중 일이지만 뭔가 신경이 쓰여서... 쓰여서 !
    사족이지만 첨가해요;;

    슬슬 저녁에 가까운 오후네요
    신나는 마무리퇴근길 되시기를 X)
  • 멧가비 2014/04/07 19:30 #

    그러고 보니 지지난달에 발굴해 낸 막걸리집에선, 알밤막걸리 꿀막걸리 이것 저것 있었는데 다 먹어보지도 못하고 왔습니다. 꿀막걸리는 확실히 맛있더군요. 꿀맛.

    리뷰는 씁니다. 뭔가를 보면 씁니다. 제 원칙입니다.


  • 2015/12/12 05:3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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