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볼 탐구 08 - 드래곤볼이 드래곤볼이 아니었더라면 by 멧가비

물론 드래곤볼이라는 작품이 후대의 모든 만화들에 끼친 영향은 말 하기도 입아프고, 드래곤볼이 없었더라면 하는 가정은 상상조차 되질 않는다. 하지만 드래곤볼이 배틀물로 전환하지 않고 당초의 기획대로 서유기 컨셉으로 계속 갔더라면 어떤 만화가 되었을지 궁금한 것 또한 사실이다. (평행우주가 있다면 어떤 곳에선 드래곤볼이 지금의 드래곤볼이 아니겠지?)


물론 서유기 컨셉으로 연재되던 당시에 인기가 워낙 안좋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피라후전만으로 끝내버렸던 것에 비하면 토리야마의 서유기 비틀기 센스가 의외로 상당하단 말이지.


손오공 - 서유기에선 5인의 일행 중에 생물학적으로 가장 오래 산 인물이다. 그만큼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드래곤볼의 손오공은 라데츠가 등장하기 전까진 과거랄 게 아얘 없었다. 그냥 꼬리달린 아이였을 뿐이었지. 그래서 서유기 컨셉으로 가는 드래곤볼이었다면 어떤 과거를 가진 손오공이었을지 궁금한 거다.
게다가 서유기의 손오공이 개차반, 망나니, 불한당 같은 단어들을 다 갖다 붙여도 모자랄 성격인데다가 살긴 또 무지하게 오래 살아서 심지어 스승인 삼장보다도 아는 게 많은 놈이었는데 드래곤볼의 오공은 완전히 백짓장처럼 순수한 야생소년이라는 점.


오룡 - 서유기의 저팔계는 탐욕스럽고 얄미운 성격이다. 게다가 색마. 오룡도 그 성격 자체가 크게 다르진 않지만 저팔계와 오룡은 그 성격이 작용하는 결과가 서로 크게 다르다. 저팔계의 욕심은 일행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고 삼장과 오공 사이를 이간질하는 건 거의 늘 효과가 있었던 것 같은데 오룡은 결정적으로 그게 다르다. 오룡이 합류한 시점에서 부르마는 오공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간질같은 건 할 틈 조차 없었고 심지어 '긴고아(緊箍兒)'에 해당하는 삐삐캔디마저 오공이 아닌 오룡이 먹게 됐다는 점. 즉, 저팔계와 다르게 트러블메이커라기 보다는 완벽한 천덕꾸러기에 개그담당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야무차 - 이런 비틀기가 또 있을까. 사오정이 '말도 안되게 못생긴 인간'처럼 생긴 요괴였는데 야무차는 상당한 미남으로 탈바꿈했질 않는가. 또한 사오정은 오공에 대한 충성심이 꽤 강한 사제였는데 야무차는 오공의 첫 라이벌이었다는 점.


부르마 - 서유기의 삼장법사에 해당하는 캐릭터가 가슴을 노출하고 버럭버럭 성질을 내는 것으로 모자라 처음 만난 오공에게 총을 쏴대고선 '왜 죽질 않느냐'니. 게다가 애초에 불경을 얻으러 드래곤볼을 찾으러 움직이는 동기 자체가 남자친구를 만들기 위한 지극히 세속적인 이유였다는 점.


치치 - 사실 서유기엔 대응되는 인물이 없는 오리지널에 가깝지만 그래도 우마왕의 딸이니 굳이 욱여넣자면 '홍해아'에 대응된다고도 볼 수 있는데, 오공이 홍해아랑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고 산다니. 이처럼 웃긴 비틀기가 또 어딨어.


무천도사 - 아마도 서유기의 '수보리조사'에 해당하는 인물 쯤 될 거다. 수보리조사는 오공이 가진 재능의 90% 이상을 만들어 준 스승인데, 따지고보면 무천도사는 오공이한테 딱히 뭘 가르쳐준 게 없다.(그냥 밝히는 노인네..) 그냥 체력단련 시킨 거 외에는 도무지 이 사람을 스승이라고 칭해도 되는건지 싶을 정도로 가르친 게 아무 것도 없다.(확실한 건 권법의 초식이라든가 품세같은 건 전혀 배운 적이 없다. 심지어 카메하메파는 그냥 눈으로 보고 따라했음.) 귀선류라는 유파가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조차 의문일 정도. 굳이 찾자면 몸을 무겁게 해서 중력을 극복하는 훈련법을 형태만 조금씩 바꿔가면서 두고두고 써먹긴 하더라.


이렇게 자잘하고 눈에 안 띄게 서유기의 온갖 디테일들을 자기 스타일대로 조금씩 비틀고 변형시킨 센스가 그 짧은 드래곤볼 초반부에 모두 들어가 있었다는 거다. 토리야마의 서유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

그냥 여담이지만, 점프에서 토리야마 선생을 무슨 세종대왕이 황희 정승 굴리듯이 그렇게 빡세게 굴리지만 않았더라면.. 아니면 적어도 프리더전이나 셀전에서 끝낼 수만 있게 해줬더라면 닥터 슬럼프나 드래곤볼 만큼은 아니어도다섯 권이나 열 권 정도 분량의 굵직한 작품 하나 더 그려낼 수 있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확실한 건 점프의 그 빡센 조련이 결과적으론 드래곤볼이라는 역사적인 작품을 하나 낳았지만 그 반대로 토리야마 아키라의 작가 생명을 크게 단축시킨 것 또한 사실일 거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