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하시 루미코 걸작단편집 高橋留美子劇場 by 멧가비


비정기적으로 내는 단편들을 모은 단편집. 시기상으로는 '란마 1/2' 연재 후기와도 겹치는 만큼 아무래도 전성기의 여유가 많이 느껴진다. 작풍도 안정적이며 이야기들도 힘을 쭉 뺀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 각 작품들의 등장 인물들이 나란히 서 있는 표지 컨셉을 쭉 유지하는 것이 특징.


그치만 마냥 가볍진 않은 소재들을 다루긴 했다. 고부 갈등이나 불륜 등 삶에서 일어날 법한 진지한 소재들을 루미코 특유의 가벼운 터치로 잘 소화해낸 걸작 단편들이 많다. 게다가 불륜 소재 작품이 은근히 많은데, 여자 작가조차 불륜을 가볍게 소재로 삼는 걸 보면 역시 일본 서브컬처 쪽에서 불륜이라는 소재가 가지는 무게가 어떤지 대충 알 법도 하다.


다만 최근으로 올수록 작품의 색깔 자체가 너무 평범해지는 듯한 느낌이 있어, '이런 별 거 아닌 얘기를 굳이 그리고 싶었던 건가' 싶은 느낌이 들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이런 소재로 다양한 단편들을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


정발본이니만큼 컬러 페이지를 그대로 살려준 건 좋은데 내가 딱 싫어하는 코팅 없는 표지 재질이라 미묘하다. 그래서 네 권 중 'P의 비극'만은 90년대 후반에 샀던 해적판으로 소장 중인데, 루미코를 좋아하게 된 계기라는 의미도 있는데다가 책 보관 상태가 좋아서 굳이 정발로 살 필요가 없기도 하고 여러모로.





P의 비극 Pの悲劇 (1994)
수록작들이 대체적으로 주부, 기혼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네 권 중 가장 좋지만 특히 'P의 비극'편은 자유롭지 못한 아파트에서의 삶을 소재로 다뤘다는 점이 많이 와 닿는다.

'화분의 비밀' 편은 섬뜩할 수도 있는 소재와 가슴 아픈 사연이 조화가 좋다.



전무의 개 専務の犬 (1999)
큰 테마가 있지는 않지만 역시나 불륜, 가족 동반자살, 기업 부도, 기억상실 등의 가볍지만은 않은 소재들을 콩트같은 단편들에 잘 녹여낸다. 특히 '방랑가족 F' 편은 결론이 훈훈하게 웃으며 끝나긴 했지만 어쨌거나 가족 동반자살을 실행했다는 점에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미묘함이 있다.



붉은 꽃다발 赤い花束 (2005)
중년 가장의 애환을 테마로 한 연작들. 권태기, 가족과의 소통 불능, 노부모 봉양 등이 주 소재.

특히 타이틀이기도 한 '붉은 꽃다발' 편은 숫제 과로사한 중년 남성의 영혼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운명의 새 運命の鳥 (2011)
변화 없는 일상의 스트레스, 작은 변화 혹은 일탈에 대한 이야기들.

대체적으로 너무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일상적인데 '사건 현장' 편은 꽤 직접적으로 와 닿는 소재라서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