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마녀전 白髮魔女傳 (1993) by 멧가비


비슷한 시기의 대표작인 정소동 [천녀유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비극적 무협 멜로라고. 괴담집 [요재지이(聊齋志異)]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 천녀유혼과 달리, 이쪽은 양우생이 쓴 동명의 "무협"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만큼 확실히 영화의 분위기도 조금 더 호전적이다.


[천녀유혼]의 영채신과 섭소천은 영화가 다루는 세계관 안에선 미약한 존재들이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측면이 강하고, 사실 애초에 인간과 귀신이라는 입장상 이뤄질 수 없는 사이. 반대로 이 영화의 탁일항과 옥나찰은 둘 다 인간인데다가 세계관 안에서 손 꼽히는 강자들이며 주체적인 면도 강하다. 가로막는 벽이라고는 파벌의 차이 뿐이었던 이들은 큰 물살에 휩쓸려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실수로 망친 면이 더 크다. 탁일항은 약속을 가벼이 여기고 믿음을 쉽게 져버렸으며, 옥나찰은 한 번만 참고 상황을 설명했으면 됐을텐데도 자존심과 야만성을 앞세웠다.


그 모든 꼬임의 원인이 어찌보면 "오해"의 한 끗 차이에서 비롯된 건데, 이는 마치 사소한 마음의 불씨 하나를 컨트롤 하지 못 해 파국으로 치닫는 현실 연애와도 비슷하다. 아직 연애 감정을 모르던 그 어린 시절이었는데도, 보면서 탁일항 새끼 약간 답답해서 좀 야마 돌더라. 오죽하면 씨발놈아 여자 머리가 하얗세 세겠냐 싶었던 거지. 근데 그거랑 별개로 장국영의 탁일항은 존나 멋지다. 무협판 제임스 딘 정도 된다.


임청하의 옥나찰 캐릭터도 훌륭하다. 마교의 업둥이라는 설정 때문인지 거의 처음부터 마녀 취급을 받고 있는데, 원작엔 없던 마교 출신 설정이 들어가서 야인과도 같은 느낌이 강하다. 야성적인 여성 캐릭터 멋있어. 그 잘나신 무당파의 도련님인 탁일항과의 대비 효과가 더 뚜렷하다. 근데 옥나찰이란 이름은 왜 빼버린걸까. 어감이 좋은데.



2편은 물리적 완성도가 떨어지기도 하고 스토리 역시 사족에 가깝지만, 주인공이면서도 영화 말미에만 등장하는 탁일항의 간지가 너무 쌈빡해서 감히 "없었어도 될 영화"라고 까지는 말 할 수 없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비슷한 시기에 [아이큐 점프]에서 연재됐던 이진영의 [백록화]라는 만화 작품이 영향을 톡톡히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임청하가 전성기에 맡은 역할들이 대개 그렇지만, 특히 이 '백발마녀'는 정말 임청하에 최적화된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포비든 킹덤]의 리빙빙이나 리메이크작의 판빙빙 모두 예쁘긴 정말 예쁜데 임청하의 백발마녀를 이길 수는 없다.



백발로 변하는 장면의 임팩트는 여느 호러 영화 못지않다. 그런데 막상 딱 변신하고 나면 마치 구미호처럼 새하얀 모습에서 뿜어내는 살기가 엄청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느낌마저 든다.


비디오 테입이 닳도록 보고 또 봤던 기억이 아련하다.



연출 각본 우인태
원작 양우생 (白髮魔女傳, 1957) - 국내출간 제목 '여도 옥나찰' (女盜 玉羅刹,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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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kurasada 2015/08/05 11:54 # 삭제

    도입부에서 나온 꽃지키는 모습 말인데
    다 보고나서 절로 나오는 한마디....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 멧가비 2015/08/05 19:07 #

    있을 때 잘 했으면 애초에 영화 자체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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