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퍼지 The Purge (2013) by 멧가비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에 대해 면책하는 국가 연중 행사. 배틀로얄 이상으로 비겁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이른바 '퍼지 데이'를 제외한 기간의 낮은 범죄율을 자랑하지만 그 통계에 퍼지 데이는 포함되지 않겠지. 쉽게 말해, 할부냐 일시불이냐의 차이 뿐이다.


인간의 폭력성을 논하는 영화의 태도가 조금 경솔하다. 폭력성과 광기라는게 한번 거하게 털어버리면 1년 정도는 적당히억누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다니! 광기와 증오를 법으로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아이디어는 영화의 소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순점이다. 그게 가능하면 퍼지 데이는 왜 필요하단 말인가.


합법적 범죄의 날이라는, 조금만 디테일을 손봤더라면 좋았을 아이디어인데 그마저도 플롯이 영 좋지 못하게 건드린다. 
영화는 다분히 반(反)종교적인 성격을 띄는데, 종교의 폭력성이 도를 넘으면 폭력 그 자체를 숭배하는 지경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자성적인 메시지가 느껴진다. 중요한 건, 그게 의도된 메시지냐 아니면 꿈보다 해몽이라는 것이냐의 문제다. 후자에 올인.


각본이 게으르다. 해당 12시간 동안 공권력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해당 기간 동안 고액의 경호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자본의 힘이 분명 개입할텐데 중산층 이상인 주인공 가족은 어째서 허술한 무인 보안 시스템에만 의지하는가, 캐쉬템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빈민층은 뭉쳐서 자경단이 될 수도 있을텐데 어째서 무력하게 사냥 당하기만 하는가, 퍼지 데이 이후의 보복 범죄는 발생하지 않는가 등등, '퍼지 데이'에 대한 기본적인 설정만 들어도 줄줄이 떠올릴 수 있는 기초적인 디테일들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재미있을만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느낌마저 든다.


때문에 영화는 그저 열 두 시간 동안의 슬래셔 판타지처럼 공허하다. 제대로 써먹지도 못할 거창한 설정 대신, 심플하게 계층간 혐오 범죄에 대해서만 다뤘으면 훨씬 집약적인 이야기였을 것 같아 아쉽다. 아니면 상기한 것처럼 아예 반 종교적인 부분에 대해 깊이 고찰했어도 좋았겠지.


그나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역시나 가장의 무게감. 대안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서 징징대기만 하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전사로 거듭나는 에단 호크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반 농담으로, 미국 내 반전 & 진보 세력을 저딴식으로 돌려까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



덧글

  • 더러운 눈의여왕 2016/06/09 23:05 #

    예고편 밖에 못봤지만 2편이 그런 맹점을 다룬
    내용이었을 겁니다. 퍼지데이에 가족을 잃은
    남자의 복수극 + 알파.


    그나저나.... 대통령 경호팀도 저 날은 쉬나
    모르겠습니다. 미국 시민권 가진 폭도들이
    백악관 진격하면 누가 막으려나...
  • 멧가비 2016/06/10 21:35 #

    음 2편도 안 보고 경솔하게 리뷰했군요.

    그나저나...에 대해서라면, 바로 옆에서 총 들고 있는 경호원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 더러운 눈의여왕 2016/06/10 21:51 #

    경솔할 것 까진 없는 게 아마 그 복수남도 퍼지데이 오길
    기다렸다가 씡나게 놀러나온 원수들 쏘던가 그럴 걸요?
    복수를 위해 1년을 기다리는 질서정연함(...)이란...
    대심 궁금해하시는 내용 상당수가 2편안에 있긴
    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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