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 The Phantom (1996) by 멧가비



인디아나 존스가 되고 싶었던 슈퍼히어로의 해골 삼신기 쟁탈전. 도굴꾼 어드벤처로선 인디아나 존스엔 당연히 훨씬 못 미치고, 이연걸의 '모험왕'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


누가 더 코믹스를 그대로 재현하나 마치 경쟁이라도 붙었던 것 같았던 90년대가 낳은 또 하나의 쾌작. 아무 배경 설명이나 변명 없이 보라색 쫄쫄이를 다짜고짜 입고 나오는 패기에 한번 반한다. 30년대 뉴욕을 멋드러지게 재현한 세트와 장쾌한 정글의 풍광에 두번 반한다.


당시로선 아마도 돈을 꽤 많이 들인 작품일텐데, 지금이라면 다 CG로 때웠을 맹수들도 실물로 출연시키고 타임 스퀘어에서 센트럴 파크까지, 30년대 뉴욕 거리를 말을 타고 질주하는 장면도 좋다. 경비행기에서 달리는 말 위에 뛰어내리는 스턴트는 기가 막힐 정도다. 아무튼 들인 돈 만큼 볼거리가 많다.


그러나 치명적인 단점은 스케일이 점점 작아지는 구조로 짜여진 플롯에 있다. 시원하게 트인 정글에서 시작해놓고선 뉴욕 거리 세트로, 그리고 사방 팔방이 꽉 막힌 동굴 세트로 동선이 이동한다. 당연히 볼거리의 폭도 점점 좁아지고 답답한 동굴 세트에선 급기야 80년대 영화보다도 못한 바보같은 주먹질로만 액션을 이어간다. 장소 이동이 역방향이었으면 훨씬 좋은 영화였을텐데.


옷깃만 스치면 자기 여자로 만드는 마성의 보라남은 아마도 기억이 맞다면 더빙판의 목소리가 박일 성우였을텐데, 컬트적으로 느끼한 미소와 그 목소리가 뭔가 되게 잘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정글에서 치명적으로 눈에 잘 띄는 보라색 쫄쫄이를 입고 백마를 타고 다니는데 대체 '걷는 유령'이라는 별명은 어떻게 얻었느냐 하는 점이다. 굉장히 특별한 것 같은 해골 반지는 거의 쓰지도 않고 시원하게 쌍권총만 쏴 대는데, 명성에 비해 하는 짓은 영 시시하다.


'전향한 악녀' 기믹의 캐릭터를 좋아하는데, 무명 시절의 캐서린 제타 존스에게 제대로 꽂혔던 기억도 난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특별한 배경 설명 없고 스토리에 크게 기여하는 바도 없는 밑도 끝도 없는 팜므파탈 기믹이라서 되려 코믹한 맛이 있었다. 반대로 메인 히로인인 다이애나는 에밀리아 에어하트에 대한 노골적인 이미지 차용을 빼면 딱히 인상적인 구석이 없는 심심한 캐릭터.


그리고 악당은 말이 필요없는 캐리 히로유키 타카와. 등장만으로 영화를 싸구려로 만드는 아주 멋진 형.


덧글

  • 더카니지 2016/06/10 21:33 #

    팬텀과 더불어 최초의 슈퍼히어로들, 또는 프로토 슈퍼히어로로 분류되기도 하는 마술사 만드레이크가 영화화된다는데 팬텀도 리메이크됐으면 좋겠네요.
  • 멧가비 2016/06/10 22:06 #

    팬텀은 캐나다에서 2부작 드라마로 리메이크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팬텀보다도 앞선 맨드레이크 형님이 있었군요.
  • 더러운 눈의여왕 2016/06/10 22:36 #

    영화는 못봤지만 팬텀 2040은 재미있게 봤었습니다.
    히어로 아버지가 대참사의 원흉이었다?!... 라는 떡밥으로
    참 맛깔나게 질질 끌었더랬죠. (...)


    근대 영화는 몇대째 팬텀이었나요?
  • 멧가비 2016/06/12 22:16 #

    2040도 기억이 나네요. 주말 낮에 MBC에서 했던 것 같은데
  • 닛코 2016/06/12 14:20 #

    저들이 다 함께 나온 슈퍼히어로 팀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토요일 아침마다 AFKN에서 보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 멧가비 2016/06/12 22:14 #

    나름대로 저들끼리도 한 식구였나보군요
  • 잠본이 2016/06/12 23:00 #

    http://zambony.egloos.com/1414105
    나름대로 노인정
  • 지드 2016/06/14 21:46 #

    https://en.wikipedia.org/wiki/The_Phantom

    https://archive.org/details/ThePhantom1943Serial-15Chapters

    빌리 제인 버젼의 경우 인터넷에선 웃음거리용으로 평가절하당하기도 했던 작품들 중 하나이지만 정작 해외 평론가들 사이에선 호불호가 갈리는 정도에 호평한 평론가들도 여럿 있었고, 개인적으로 역대 팬텀 실사화 작품들(판권 문제가 얽혔던 캡틴 아프리카, 무허가로 제작된 터키판 영화들까지 다 포함해도) 중 "팬텀의 실사화"에 있어선 이 버젼이 단점 역시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위의 1943년도 실사판도 제작 시기 등 외적 요소를 감안하면 긍정적으로 봐줄 수 있는 등 다른 판본 중에도 맘에 든 작품들은 있지만)

    DC, 마블의 슈퍼히어로들보다도 먼저 나와 올해로 80주년 맞이하는 고전 중의 고전 슈퍼히어로물이란 소재 자체가 현재는 물론이고, 다른 각색본들이 제작될 시절에도 옛날 느낌 난다고 여긴건지 애니판, 게임판, 2000년대 실사판이 시대배경을 현대 이후 혹은 아예 미래로 바꾼데 비해 이 작품은 오히려 고전 시대를 배경으로 당당히 밀어붙힌 점도 맘에 들었습니다.
  • 멧가비 2016/06/14 22:31 #

    옛날 코믹스를 소재로 가져와 시대 배경을 그대로 재현하는 게 90년대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트렌드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팀 버튼 배트맨의 시대착오적인 디자인에서 영향들 받았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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