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Batman (1989) by 멧가비


시처럼 함축적인 영화. 거리의 매춘부가 열 살 남짓한 꼬마에게 손을 내미는 도입부 장면, 도시의 타락을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설명한다. 배트맨의 분노는 경박한 몰락귀족의 가면으로 가리고, 조커의 분노는 기상천외한 쇼맨십으로 치환해 세상애 뿌린다. 주인공들의 성격을, 말이 아닌 그들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시적이다. 이성과 논리 대신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감성으로 접근하게 되는, 인상주의 회화같은 슈퍼히어로 영화.


영웅과 악당을 각각 묘사하는 전통적 서술 방식이 뒤집힌다. 영화 전체를 통해 공들여 묘사되는 것은 조커의 탄생과 몰락. 조커가 미디어에 노출되고 시민의 환호를 받는 동안, 배트맨의 존재감이란 그저 구전 도시전설처럼 시민들의 입 위에 떠돈다. 얼터 에고인 브루스 웨인이라는 사람은 도시 언론의 기자들조차 그 얼굴을 모를 정도로 베일에 쌓인 은둔자. 심지어 비키 베일이 정체를 파헤치겠노라 동분서주하는 인물 역시 브루스 웨인이다. 전형성의 전복임과 동시에 전형적인 팀 버튼 악취미다.


조커 가스의 첫 희생자는 유명한 모델들이며 그 다음 피해는 미용실에서 발생했다는 뉴스 보도. 주인공 조커는 아집으로 뭉친 광기의 예술가처럼 군다. 뚜렷한 달성목표 없이 그저 발산할 뿐인 광기는 그를 "죽을 자리를 찾아 헤메는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이 맥락에서 조커의 범죄들은 전위 예쑬가의 생애 마지막 퍼포먼스로 해석된다. 그렇다, 주인공은 조커다.


타이틀롤인 "배트맨"은 나머지 두 인물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조커에겐 복수의 대상, 비키에겐 취재 대상. 이야기를 악당이 주도하고 영웅은 누군가의 객체로만 존재하는 팀 버튼의 이 못된 너스레는 이후의 배트맨 영화들의 경향으로 자리잡는다.


이야기처럼 시각적으로도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금주법 시대에서 온 듯한 마피아들이 드글대는 도시에서 그들을 무찌르는 건 대저택의 몰락한 영국 귀족. 그 시대착오적인 충돌에 프린스의 음악이 끼어들면 이미 영화의 시간 개념이라는 것은 아수라장이다. 1954년 고지라의 시신을 박제해 세운 듯한 도시의 건축물, 그 사이를 헤집고 질주하는 배트모빌 등은 차라리 한 폭의 꿈 그림이다. 늙은 흡혈귀가 관에 누워 꾸는 사정몽(射精夢)과도 같다. 금주법 시대의 미타테(見立て)는 90년대로 이어져 클래식 코믹스 영화의 붐을 촉진하기도 한다.






연출 팀 버튼
각본 워렌 스카렌, 샘 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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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ㄴㅂ 2016/06/13 14:52 # 삭제

    얼마 전까지도 저 노란색 배경이 더해진 박쥐 마크가 고전적, 내지는 촌스럽다고만 여겼는데, 생각해보니 모노톤 배트맨보다도 참 강렬하게 와닿는 색감이네요. 검은색과 노란색의 조화도 조화지만 그 자체가 배트 시그널을 형상화한 듯한 미감도 느껴지고, 애초에 유틸리티 벨트도 금색에 가까운 노란색으로 묘사되니만큼 통일성있는 배색이군요.
    극도의 우울-함만을 기저에 깔고 가는 현대의 배트맨과 좀 더 낭만적인 모험을 펼치던 시대의 배트맨의 절충 같이도 느껴집니다.
  • 멧가비 2016/06/13 21:44 #

    노랑-검정 조합은 색채학적으로 위험함을 나타내기도 하지요.
  • 포스21 2016/06/13 20:59 #

    수퍼맨 영화시리즈가 갈수록 망해가던 시절, 혜성처럼 나타나서 수퍼히어로 영화의 중흥을 이끌었죠. ^^
  • 멧가비 2016/06/13 22:59 #

    90년대 슈퍼히어로 영화 붐의 기폭제가 된 건 맞아요
  • 잠본이 2016/06/14 20:54 #

    TAS에서 사람들이 (케네디 시대 이전에나 쓰고 다녔을) 중절모 쓰고 휴대전화 거는거 보고 팀버튼이 미친 영향이 대단하구나 느꼈습니다...
  • 멧가비 2016/06/14 22:32 #

    미드 '고담'에서도 그러고들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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