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90은 마블 코믹스에게 있어서 암흑의 시기였다. 재정 문제에 처한 마블은 자식과도 같은 캐릭터들의 영화화 판권을 이리 저리 팔아치웠고, 배트맨 프랜차이즈의 패색(敗色)을 확실히 느낀 워너에게 있어서 블레이드는 배트맨의 뒤를 이을 좋은 후발주자였을 것이다. 박쥐와 흡혈귀! 시적이기까지 한 소재 연결.
타임 워너 입장에선 상업적으로 검증된 배트맨 프랜차이즈를 재탕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마치 리메이크처럼 보일 정도로 영화는 '배트맨'의 플롯을 그대로 따라가는데, 어둠에 숨어 활동하는 다크 히어로와 그를 돕는 늙은 집사의 구도. 악당인 프로스트는 조직 내에서 탕아 취급 받으며 눈 밖에 난 점, 블레이드의 부모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건드린다는 것까지 잭 니콜스의 조커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영화 전체로 보면 블레이드의 탄생을 구구절절 보여주지 않고 바로 시작하는 점 역시 마찬가지. 게다가 뱀파이어 헌터가 뱀파이어를 쫓는 이야기라는 단순 명쾌한 구도이다보니 블레이드와 프로스트가 어떻게 안면을 트는지조차 설명할 필요가 없으며, 절반은 뱀파이어라는 설정상 블레이드가 보여주는 자기 혐오도 쉽게 설득력을 갖는다. 보통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2편이 가질 이점을 1편부터 누릴 수 있었던 것.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영화들로 인해 '슈퍼히어로는 유치하다'는 인식이 60년대에 이어 다시 한 번 확산됐으나, 마침 블레이드는 가면과 스판 옷과는 거리가 먼 제법 현대적인 외형의 캐릭터였고, 뱀파이어라는 소재는 슈퍼히어로라는 장르에 대한 편견을 가리기에 충분히 자극적이고 오락적인 것이었다. 당시 웨슬리 스나입스는 차세대 액션 스타로서의 상업성과 연기력을 동시에 증명한 (블레이드라는 캐릭터에 적합한)흑인 배우이기도 했으니, 시작부터 '되는 기획'이었던 셈이다.
뱀파이어 카운슬과 프로스트의 갈등은 보수와 진보, 혹은 온건파와 강경파의 마찰로도 보인다. 이 영화의 프로스트는 마치 뱀파이어 세계의 매그니토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뱀파이어들을 마치 마약 중독자들처럼 묘사하는 방식이 신선했다. 쿵푸 양키 파이터라는 이미 익숙한 스테레오 타입이 뱀파이어와 결합하고 90년대 트렌드인 테크노 음악까지 깔리니, 그 조합들의 화학작용이 뭔가 '쿨한 것'처럼 보이는 신기한 결과를 낳는다. 이른바 '하이브리드 액션'이라는 하위 장르를 만들어 결국 '매트릭스'에 이르게 되는 흥미로운 장르사. 또한 R등급 슈퍼히어로 영화로서는 '데드풀'에겐 조상 뻘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2천년대 마블 르네상스의 신호탄이 될 줄은 이 당시엔 아무도 몰랐겠지.
영화의 퀄리티와는 별개로, 어릴 때 보던 이 멋진 형이 나오는 영화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설렜다.
여러모로 긍정적인 국면 전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웨슬리 스나입스에게는 독이 든 성배이기도 했다. 이 시리즈로 확실히 입지를 굳힌 웨슬리 스나입스는 뻣뻣한 액션 스타의 이미지마저 덤으로 얻게 된다. 좋은 영화가 좋은 배우를 망쳐 놓은, 알고보면 꽤 흔한 사례 중 하나.
제작 뉴라인 시네마, 배급 타임 워너
연출 스티븐 노링턴
각본 데이빗 S. 고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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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데, 블레이드의 엄마는 블레이드를 출산하던 중에 사망했다. 즉, 이 모자는 서로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을 뿐더러 장성한 블레이드를 엄마가 알아 볼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또한 엄마는 마치 블레이드를 오랫동안 기르기라도 한 것처럼 '에릭'이라는 본명을 불러 멘탈 공격을 하는데, 대체 그 이름은 누가 지어준 것이며 엄마는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이 아이의 이름은 에릭입니다, 라고 유언이라도 남겼단 말인가.
물론 블레이드는 (영화 상에선 등장하지 않는) 엄마의 사진을 통해 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며, 엄마 또한 뱀파이어로 숨어 살면서 블레이드의 성장을 지켜봐왔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상상해서 인과관계의 구멍을 메꿔야 한다면 너무 구차하다. 오류는 그냥 오류.
덧글
블레이드는 위탁가정이나 고아원으로 이송됐을 수도 있지요. 위슬러는 부랑아처럼 떠돌던 아이가 피를 빨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블레이드가 적법한 절차와 환경안에서 근근히 성장 했다가 피에 대한 갈증으로 탈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명 에릭, 그것은 아마도 블레이드 어머니가 분만실에서 외치던 이름 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진이나 모습은 아마도 블레이드가 위탁됐던 기관의 서류 안에서 확보했을 가능성이 크죠.
특히 블레이드의 어머니는 프로스트 측근에 속해 있었습니다.
영화상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블레이드 어머니를 공격한 건 프로스트란 이야기를 영화를 보면서 친구들과 하기도 했죠. 뭐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뱀파이어 세계에서 블레이드는 데이워커로 골치덩어리로 부각됐겠죠.
분명 뱀파이어들은 친흡혈귀파의 일반인들까지 동원해서 블레이드의 뿌리를 추적했을 겁니다.
그리고는 블레이드의 어머니와 블레이드의 관계까지 알아냈겠죠.
뭐... 대충.. 끼워맞추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영화 블레이드 시리즈를 너무나 좋아하는 1인이기에 글이 반가워서 댓글도 남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