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E WALL-E (2008) by 멧가비


당시 가장 놀라웠던 건, 그 픽사에서 인류가 사라지고 황폐해진 지구가 배경이라는 사실이었다. 픽사는 디즈니와 협력 관계였을 때나, 결별을 지나 자회사로 흡수 되는 모든 과정에서 늘 월트 디즈니의 최소한의 자장 아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영화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물론 지구로 귀환한 인류가 희망을 찾는 결말이었지만 이것은 월트 디즈니의 뻔한 해피엔딩이라기 보다는 가족 영화로서의 해법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또한 드물게도 무생물이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전에 '카 (2006)'가 있긴 하지만, '카'는 영화 속 세계관에서 자동차들이 사실상 또 다른 인류이기 때문에 플롯상 무생물이라고 보긴 힘든 반면 이 영화에서의 월-E를 비롯한 로봇들은 그냥 명백히 로봇이다. 대사를 포함해 감정 표현이 제한되어있는 로봇이 중심 인물들이라는 작품의 특성상 여러가지 방향으로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점이 재미있다.


월-E는 감정을 가진 로봇이다. 디폴트 상태로서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경험이나 학습에 의해 형성된 감정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영화 속 월-E는 양산형 제품군의 마지막 개체다. 적어도 영화 속 묘사에 의하면 그 월-E가 무리 중 특별한 개체라거나 하는 추측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E가 혼자 살아남은 이유는, 어쩌면 인류에 의해 버림받은 지구에서 월-E들 스스로도 임무를 지속할 동기와 존속의 의미를 잃고 그들 스스로 작동 정지(자살)를 택한 것은 아닐까. (물론 자의식 떼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모래 폭풍에 의한 고장이거나 단순 노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긴 하다.)


월-E의 외로움을 추측할만한 묘사들이 있다. 영화 속 마지막 월-E는 바퀴벌레가 다칠까봐 안절부절 하면서도 다른 월-E의 시체에서는 캐터필러를 무심하게 벗겨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월-E는 예술적 취향은 물론, 동정심, 사랑, 생명 존중의 태도 등을 보이는데도 다른 월-E의 시체에 대해서는 그러한 태도를 보인다는 건, 아마도 같은 월-E들은 군체 의식을 공유하는 그저 다른 개체의 단말기 쯤으로 인식해, 월-E 끼리는 외로움을 해소할 대상으로 여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기능을 멈춘 또 다른 자신의 몸에서 부품을 떼어낸다는 개념 쯤.


또한 이브도 인간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월-E가 양산형 저성능 로봇 중에서 가장 멘탈이 강했던 개체라면 반대로 이브는 고성능 엘리트 로봇임에도 어떠한 컴플렉스를 겪는 것으로 보인다. 탐사 로봇임에도 유난히 공격적이고 짜증스러운 태도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컴플렉스에 사로잡힌 엘리트가, 자신보다 낮은 계층 출신의 순수한 짝을 만나 그가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월-E의 순수함(혹은 고독함)을 대변하는 '헬로 돌리'의 테마곡이 마치 불량 로봇 혁명의 진군가처럼 사용되는 장면이 재미있다.


인류의 "넥스트 레벨"을 다루는 작품에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패러디한 건, 센스가 좋았다, 라고 평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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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 정지된 이브를 데리고 다니면서 괴상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월-E의 모습에서 네크로필리아적인 태도가 보여서 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난다. 과한 해석이지만 그렇게 보이는 걸 어째.



덧글

  • qu 2016/07/19 17:23 # 삭제

    제가 봐도 약간 이상하긴 했어요.. 소름은 안끼쳤지만
  • ChristopherK 2016/07/19 18:43 #

    그보다 EVE가 바퀴벌레에게는 반응이 없었는데, 녹색식물에는 바로 반응해서 대기상태로 들어간 것을 보면...

    바퀴벌레따위가 사는 세상은 역시 쓸모가 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 ChristopherK 2016/07/19 18:45 #

    EVE를 데리고 다녔던 것은 그냥 월E의 왜 저러는지 몰랐을테고, 그냥 기다리면 깨어나지 않을까..하는 순진함이었겠죠. 인공지능 수준을 감안할 때(.)
  • 잠본이 2016/07/21 00:37 #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잇는 디즈니 시체애호증의 유구한 전통! (얌마)
  • 멧가비 2016/07/21 17:45 #

    그러고보니 근본이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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