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볼 탐구 15 - 드래곤볼 작품론 [2] 태도와 윤리관 비판 by 멧가비


'프리더 편' 이후 작품의 질은 사실상 계속 떨어지는데도, 최악이라고 평가 받는 '마인 부우 편' 마저 적어도 독자의 몰입감과 흥분 만큼은 늘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할 수 있는 퀄리티를 자랑했다. 늘 프리더 편에서 끝나는 게 최고였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의 경제와도 긴밀한 영향이 있었던 그 지리한 연장을 마냥 비판할 수 만은 없다. 한 마디로, 작가의 천재성 하나로 다 해먹은 작품이다.


동시에 옛 독자로서 나이가 들고 더 많은 것을 비춰가며 생각할 수록 실망스러운 점들이 눈에 띄는 작품인 것 또한 사실이다. 가치관과 철학의 부재에서 오는 "얕음"은 점점 취향과 멀어지는 부분이며, 끝이 없이 발견되는 온갖 설정 오류들은 매니아로서 파고 들기에도 방해되는 것들이다. (설정 놀음을 할 수 없는 작품이 설정 매니아들에게 어떤 의미일지는 부연 설명이 필요 없겠다.)



드래곤볼의 초기엔 타 장르 작품들에 대한 오마주와 작가 본인 취향의 코미디들이 넘쳤다. 인조인간8호나 우파 등의 조연들과는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강함에 대한 오공의 욕망은 순수한 소년의 일도정진(一道精進)이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묘사되었으며 캐릭터들은 각자의 역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작품이 진행되고 "Z"라는 서브 타이틀을 달면서 작품 속 세계관은 그저 전사들의 전장으로만 소모되었으며 캐릭터들은 육체의 힘이 약하면 도태되는 이른바 "파워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진다.


휴머니즘은 사라지고 만화는 그저 결투만을 보여주기 위한 기획성 스토리로 단순해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 "강함"에 있어서도 노력 이상으로 "혈통"과 "인맥"을 우선시 하게 된다. 오공의 혈통이 외계인으로 밝혀지고 동족이 등장하며 그들의 자손들이 힘을 물려받음으로 인해, 지구를 지키는 데 정작 지구인들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결과를 낳게 된다.(우연찮게도 초대 [울트라맨]에 대한 비판과 일치한다.) 결국 산골 소년의 모험으로 시작한 만화는 외계 난민들의 지구 정착기로 괴상하게 끝을 맺는다.


'서유기'의 '무자진경'을 블랙 코미디적으로 변주한 '드래곤볼'이라는 소재는 여행의 "목적"에서 벗어나, 그저 이야기 진행을 조금 더 간편하게,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챙기느라 이야기 진행이 발목을 잡지 않도록 넘겨주는 소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는 단순히 소재의 비중이 줄어드는 문제를 넘어 곧 "생명 경시"로 이어진다. 그 장대한 알고보면 프리더 편은 동료들을 되살리기 위한 여정에서 출발한다. 그만큼 목숨이라는 것을 다루는 무게감 역시 존재했다.


그러나 이후부터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것은 실질적인 의미의 죽음이 아닌, 되살리기 위해 드래곤볼을 개조하거나 다른 지역의 드래곤볼을 빌리러 움직이는 등의 부가적인 미션을 제시함으로써 전개를 조금 번거롭게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작가의 본래 아이디어가 아닌, 외부의 요청으로 연장된 이야기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지막 파트인 마인 부우 편에서 선대 계왕신이 오공에게 목숨을 넘겨주자마자 머리 위에 고리를 달고 벌떡 일어나는 장면 쯤 되면 본작에서 생명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에 연쇄해서 "윤리 혼돈"의 문제까지 발생한다. 작중 흔히 볼 수 있는 흐름 중 하나는 "드래곤볼을 이용해 죽은 모든 지구인을 살리되, 악인은 제외한다"는 사고방식이다. 기본적으로 초인들의 싸움에 죽어나가는 시민들을 거대 괴수 특촬물의 미니어처 빌딩 정도로 취급하고 있으며, 악인을 되살리거나 죽은 채로 놔둔다는 개념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쥔 것 역시 주인공 일행, 즉 드래곤볼을 자기 물건처럼 아무 때나 가져다 쓸 수 있는 "강한" 무리들이 타인의 목숨에 대한 존엄을 판단하는 권리 마저도 갖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억울하게 죽었지만 죽은 채로 놔둬도 되는" 악당이란 어떤 존재인지 역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저들이 잔인한 대학살을 저지른 베지터는 마지막 까지 당당한 주역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되겠다. 악인이라도 공이 있으면 인정한다. 이는 작품 연재 당시부터 꾸준히 드래곤볼에 대해 가해지는 비판이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보니 발견되는 많은 문제점들과 작품의 한계. 이 모두는 근본적으로는 토리야마 아키라 본인의 무신경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머리카락에 먹칠 하기 귀찮아 초사이야인 설정을 도입하고 배경을 그리기 귀찮아 결투 시작부터 모두 날려버리는 게 작품의 매력이 된 것처럼, 작가 스스로도 인정한 귀찮음 혹은 무신경함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을 형성했지만 동시에 작품의 한계 역시 스스로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작가의 작품관 이상으로 문제되는 것은 소년 점프 측의 "팔리면 그만"인 상업주의일 것이다. 주로 10대 안팎의 나잇대를 타겟으로 삼는 소년 만화에서 성인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윤리관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는 핑계를 대선 안 된다. 가치관이 아직 단단히 여물지 않은 단계의 독자일 수록, 작품이 제시하는 기초 윤리관은 중요하다.


종합했을 때, 생명 윤리에 관한 모든 문제점의 근원은 결국 '파워 인플레'로 수렴된다. 애초에 드래곤볼은 사람의 생명을 되살릴 수도 있는 물건이다. 다만 작품이 진행될수록 드래곤볼을 수집하기 위한 고난이 생략되는 것이다. 드래곤볼을 둘러싼 쟁탈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주역들의 전투력이 강해짐으로써 드래곤볼은 당장 손에 쥐고 있지 않을 뿐, 사실상 오공 일행이 독점하는 물건과 다름 없다. 뿐만 아니라 드래곤볼 이상으로 필멸자들의 생명을 주관할 수 있는 존재, 계왕신 등과 직접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오공 일행이 '전투력'만으로 우주의 거물이 되었다는 점도 있다. 파워 인플레라는 것은 수 많은 아류작들을 양산하기 이전에 드래곤볼만의 흡입력 있는 전개로써 작품 고유의 매력으로 작용했지만 그 이면엔 다른 무언가를 변질시키는 부작용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덧글

  • 포스21 2016/08/25 20:59 #

    확실히 나이를 먹고 보면 이상한 점 투성이군요. ^ ^ 어릴때는 그냥 만화니깐... 하고 넘겼지만..
  • 멧가비 2016/08/28 21:30 #

    사실 저처럼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으면 여전히 그냥 재미있는 만화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 lelelel 2016/08/26 20:46 # 삭제

    애초에 토리야마가 그리려 했던 방향성인 초기느낌이 지속되었으면 어땟을지 궁금합니다. 약간 다른 분위기의 제2의 닥터슬럼프가 되었을까요?
  • 멧가비 2016/08/28 21:29 #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닥터 슬럼프 이후의 단편들은 다 닥터 슬럼프 같고, 드래곤볼 이후의 단편들은 대체적으로 드래곤볼 같거든요. 그런데 확실히 드래곤볼Z 시절의 인기를 생각하면 초기 느낌으로는 오래 못 갔을 것 같네요. 팬으로선 차라리 서유기 포맷 코미디로 짧게 끝내고 장편 하나를 더 해줬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남지만요.
  • lelelel 2016/08/28 23:21 # 삭제

    저도 작화도 그렇고 초기의 느낌도 정감가서 좋긴한데,
    만약 지금같은 드래곤볼이 안나왔다면 과연 일본만화계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긴하네요.
    그리고 조산명 할배는 과연 지금같은 위치에 다다랐을지, 아니면 그냥 그 당시의 많은 코미디물 작가로 남았을지 궁금하네요.
  • 멧가비 2016/08/29 19:16 #

    드래곤볼Z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전 세계적인 명성은 없었겠지만 흔한 코미디 작가 중 하나도 아니었을 겁니다. 닥터 슬럼프로 이미 레전드 찍었어요.
  • lelelel 2016/08/29 19:33 # 삭제

  • 멧가비 2016/09/05 14:47 #

    주목할만한 자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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