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Virtuosity (1995) by 멧가비


네트워크와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두 분야는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하다가 어느 시점에 서로 만나 화학 작용을 일으켜 수 많은 예술가와 이야기꾼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게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된다. 90년대 SF의 가상현실 붐의 근원을 다른 무언가로 설명할 수 없다면 말이다.


자신의 가족을 죽은 살인범을 쫓는 경찰의 이야기, 플롯 자체는 익숙한 액션 장르의 결을 그대로 따른다. 그러나 상투적인 이야기에 당시 장르적 트렌드이기도 했던 '가상현실'이 소재로 사용된 점은 분명 새로운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나 3D로 구현된 가상현실 시뮬레이션 게임을 꽤 그럴듯하게 묘사한 선구자적 영화. 시뮬레이션 속 AI 캐릭터를 연기하는 러셀 크로우의 연기력이 영화의 생명력을 절반 정도 책임지고 있기도 하다.


감독의 전작 [론머맨]의 플롯을 뒤집은 점이 재미있다. 론머맨의 조브가 네트워크 세상으로 들어가 신이 되려 했다면, 본작의 시드(SID 6.7)는 현실로 빠져나와 프로그램 캐릭터로서의 한계를 벗고 무소불위의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된다. 정확히는 주인공 파커 반즈의 가족을 죽인 살인마가 시드 본인이진 않지만, 해당 살인마의 인격을 베이스로 삼고 카피캣처럼 군다는 점에서 반즈에게는 가족 살인범과 시드를 동일시할 명분을 준다. 이는 네트워크 세상의 익명성이 갖는 위험을 경고하는 은유로 볼 수 있다.


작품 자체는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채 몇년 지나지 않아 SF 가상현실 장르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는 [매트릭스]에 비주얼적 모티브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연출 브렛 레너드
각본 에릭 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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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테입으로 수입된 제목이 [덴젤 워싱턴의 킬링 머신]이었는데, 영화의 내용과 크게 상관있진 않지만 임팩트 있고 무지하게 B급스러운 제목이라 개인적으로는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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