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층 The Thirteenth Floor (1999) by 멧가비


[트루먼 쇼]처럼 자신이 가짜 세상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후 [버추오시티]의 SID처럼 세상으로 나오려는 인공지능, [로보캅]처럼 자아의 주체는 기억이라고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 혹은 [매트릭스]처럼 그것 조차 전자 신호로 프로그래밍 된 가짜 기억. 


자아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SF 소재들의 집합체같은 영화다. 철학적이다 못해 추상적인 고민에 직면한 인물은 빈센트 도노프리오가 연기한 제리 애쉬튼. 그러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제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며 한가하게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뻔한 존재론적 고민에 빠지는 대신 그는 그래픽 세상과 그래픽 몸에서 벗어나 현실로 역류해 유저의 몸을 차지한다. 잠시나마 진짜 인간이 되어, 태어난 곳(서버실)에서 죽는 궁극의 귀소본능을 발휘하며, AI로 태어난 그는 인간으로 죽는 데에 성공한다.


애쉬튼의 이야기가 끝나면 주인공이 남아있다. 영화는 주인공 더글라스 홀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묻는다. 제리의 저 비극적인 존재가 당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일까, 라며 말이다. 어디까지가 진짜 세상이고 어디부터가 가짜 세상일까. [인셉션]의  "꿈 속의 꿈" 코드가 이 영화로부터의 영향이 아닐 가능성은 얼마나 될지도 물론 개인적으로는 궁금한 부분.


영화가 재미있는 지점은 흔한 철학적 고민 대신, 유저와 아바타들의 갈등 사이에 오히려 지극히 알기 쉬운 인간적 감정들을 채워 넣었다는 점이다. 존재 의미 따위의 형이상학적 이유 대신 인물들이 갈등하고 부딪히는 이유는 오히려 치정에 머물러있다. 차가운 과학의 영역에서 다분히 인간적인 이야기를.


영화의 주제와는 다른 얘기지만, 결국 제인 풀러는 가공의 인물을 사랑하게 된, 이른바 고도의 오타쿠인 셈이다. 현실의 남자와 외도를 해도 모자란 마당에 시뮬레이션 게임 캐릭터와 불륜이라니, 그것도 자신의 모습을 본뜬 캐릭터와. 생각해보면 남편이 눈깔 뒤집힐만도 하다.



연출, 각본 조셉 러스넥



핑백

  • 멧가비 : 매트릭스 The Matrix (1999) 2016-12-09 15:23:30 #

    ...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90년대의 세기말적 분위기를 타고 쏟아져 나온 네트워크 가상현실 SF 영화들의 연이은 행렬은 이 영화에서 화룡점정을 이룬다. (물론 [13층]의 개봉이 더 늦지만, 장르와 시대가 소통한 흐름의 한 챕터는 이 영화 시점에서 이미 상징적으로 완성-완결됐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영화의 통찰이라고 생 ... more

  • 멧가비 : 소스 코드 Source Code (2011) 2017-03-07 14:20:34 #

    ... . 마지막에 굿윈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은, 굿윈이 콜터를 지켜보고 있는 그 현실도 사실은 소스 코드로 이뤄진 가상현실이라는 반전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13층] 아류 소리를 듣겠지만, 아무런 알맹이가 없는 영화보다는 재미있는 우라까이가 나은 경우도 있다. 이미 죽은 군인에게 까지 임무를 내려 영혼 까지 털어먹는다는 설 ...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