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 날 The 6th Day (2000) by 멧가비


사실 영화의 논쟁 자체는 해묵은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있어 "철학의 부재"가 불러올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것 말이다.


영화의 세계관은 복제 인간 기술이 이미 완성된 근미래. 마치 복사기 돌리듯이 클론을 뚝딱 찍어낼 수 있는 판타지의 영역에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이 부분은 마이클 키튼 주연의 [멀티플리시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영화는 코미디인데!) 쟁점은 그것을 합법의 영역, 즉 양지로 끌어낼 수 있느냐에 대한 여부인데, 재미있는 점은 영화의 악당인 자본가나 과학자를 단순한 악인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세계관 자체에 이미 어느 정도는 생명에 대한 철학과 윤리의 수준이 바닥에 도달했음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어린 아이들의 세상을 통해서 드러난다. 사람처럼 생긴 데다가 심지어 (마치 저주받은 일본 목각 인형처럼)머리카락이 자라는! 인형이 최고의 생일 선물로 여겨지는 아이들 문화. 게다가 죽은 애완 동물을 복제하는 '리펫'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가르쳐주기를 곤란해하는, 혹은 게을리하는 풍토에서 성장한 사업이다. 이는 이 아이들의 부모 역시 삶과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생명 그 자체가 아닌, 과학 기술로 적당히 대체할 수 있는 기계적인 무언가로 여기며 자라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즉, 세계관 자체에 아동 방관, 가정 교육의 부재가 팽배하다.


같은 맥락은 사업가 드러커가 수족처럼 부리는 네 명의 총잡이들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딱히 유능한 전문 해결사들도 아니고 임무만 맡겼다 하면 죽어서 돌아오는 얼치기들에 가까운데, 드러커는 더 유능한 새 사람을 고용하는 대신 이들을 계속해서 복제한다. 마치 아끼는 장난감이 망가졌을 때 원래의 것과 똑같은 것을 또 사려는 어린 아이처럼 말이다.


아쉬운 점은, 조금 더 각본에 신경 썼다면 고유한 색깔을 가진 컬트 영화 쯤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실제 결과물은 아놀드 슈월츠네거의 근육 액션쪽에 더 포커스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쉰을 훌쩍 넘은 슈월츠네거의 액션은 굼뜨고, 영화의 논쟁은 슈월츠네거가 쓰고 남은 분량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언급되기 때문에 감질난다.


촬영이나 편집 과정에서 확신이 없었는지, 클라이막스가 조금 빠르고 에필로그는 늘어진다. 덜 배양된 복제 드러커와의 싸움이 그래도 클라이막스일텐데, 그 장면의 그로데스크함을 생각하면 영화가 분명 실제 결과물 이상의 잠재력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앗쌀하게 B급 테이스트를 강화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연출 로저 스포티스우드
각본 코맥 위벌리, 마리안 위벌리



----

영화 속에는 [터미네이터]를 인용한 유머가 언급되기도 하고, 설정 면에서는 [토탈 리콜]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