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The Matrix (1999) by 멧가비


굳이 비교를 하자면 [터미네이터] 플롯을 확장한 개념이다. 인간에게 반기를 든 기계가 인간을 몰살시키기로 결정하면 터미네이터 세계관이 되는 거고, 매트릭스에 넣어 살아있는 건전지로 써먹기를 결정했다면 이 영화의 세계관이 되는 셈이다. 전자의 기계들이 분노했다면, 후자인 이 영화의 기계들은 조금 더 생산적으로 머리를 굴렸다고 볼 수 있겠지.


"살아있다"는 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을 탐구하는 과정의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인간들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죽음보다 못한 삶임에도 실체를 직시하는 것이 중요한지(모피어스) 아니면 허상에 속더라도 삶을 누린다는 느낌과 만족감이 더 중요한지(사이퍼)에 대한 대비가 중요한 고민이다.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인간들을 사육하기로 결정한 기계들에게도 해당되는 동일한 고민일 것이다. 애초에 생명이라는 것이 없는 기계들이 인간을 사육해가면서 까지 유지하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말이다. 역설하면, 인간처럼 산소를 호흡하며 유기적인 세포 분열을 하는 것만이 "살아있는 것"이고 육신 없이 사고만으로 존재하는 개체에게 삶이란 없는가에 대한 고민인 셈이다. 즉, 이 영화의 기계들은 구체적인 캐릭터성이 부여되지 않았을 뿐,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칸트들이 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지점에서 사고한 것이다.


영화는 삶에 대한 탐구 아래에 종교의 상징성을 끌어들여 이야기를 조금 더 풍부하게, 그리고 "있어 보이게" 만든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흔히 "색즉시공 공즉시색" 쯤으로 간추려서 언급된다. 실체를 가진 것은 곧 사라지고, 사라져 비어 있는 곳엔 곧 다른 실체가 자리하게 되는 굴레 정도의 뜻으로 주로 알려진 반야심경의 가르침이다. 개인적으로는 물질의 유한함(공허함)과 정신의 무한함(본질)을 대비한 글귀라고 해석한다. 영화 속에서 실체가 있는 현실 세계는 이미 기계의 지배 아래 문명을 잃었고, 기계들이 전기 신호로 만든 매트릭스 안에서는 기계들에 맞설 힘과 깨달음을 얻는다. 컴퓨터 네트워크 속 가상현실 소재로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색(色)-공(空)의 대비라고 생각한다.


색즉시공이라는 불교적 선문답으로 만들어진 세계관에서 깨달음을 얻은 네오는 그저 해탈하고 벗어나는 데에서 그치는 대신, 인류를 구원할 기독교적 메시아로 각성한다. 게다가 세계관의 혼란은 그야말로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재해석. 즉, 영화는 불교-기독교-도가 사상을 엔터테인먼트적으로 잘 휘둘러 섞은 세기말 최고의 철학적 오락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90년대의 세기말적 분위기를 타고 쏟아져 나온 네트워크 가상현실 SF 영화들의 연이은 행렬은 이 영화에서 화룡점정을 이룬다. (물론 [13층]의 개봉이 더 늦지만, 장르와 시대가 소통한 흐름의 한 챕터는 이 영화 시점에서 이미 상징적으로 완성-완결됐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유효한 논쟁적 영화이며, 당시는 말할 것도 없이 온갖 담론들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사실 해석이 필요한 영화는 아니다. 영화가 끌어들인 수 많은 상징성들은 영화를 "있어 보이게"는 할지언정, 그것들이 영화의 플롯에 크게 기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철학적 "힙스터" 영화 정도.


영화의 통찰이라고 생각하는 부분 한 가지는, 그래도 영화 속 세계관이 우리의 실제 세상과 꽤 흡사한 면이 많다는 것이다. 거짓 정보에 속아서 세상을 좁게 바라보며, 사회의 시스템 안에 건전지처럼 착취 당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연출, 각본 라나 워쇼스키, 릴리 워쇼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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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닛코 2016/12/10 00:43 #

    프로그래머의 말에 따르면, 영화의 전개가 프로그래밍의 과정과 딱 일치한다고 하더군요. 예체능인 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 멧가비 2016/12/10 14:30 #

    그래서 제가 영화를 이해 못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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