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추럴 시티 (2003) by 멧가비


SF 사이버펑크 장르에 한국식 멜로를 도입한 자체는 흥미롭다. 흔히 한국식 장르를 두고, 메디컬물은 의사가 연애하고 수사물은 경찰이 연애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는데, 한국식 SF라면 안드로이드와 연애하는 것도 있을 법한 이야기다. 문제는 그걸 다루는 방식이지.


기본적인 플롯은 [블레이드 러너]를 뒤집으며 시작하지만 '심심이' 수준의 인공지능 뿐인 로봇을 인간이 사랑한다는 것부터가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 차라리 끝내주는 섹스 토이라면 모를까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로맨스 당사자인 R과 리아의 캐릭터부터가 불분명하며 그 사이에 낀 시온은 삼각관계의 희생양인 건지 아니면 그냥 깃발 뺏기의 깃발 역할일 뿐인지도 모호하다. 캐릭터들이 존재는 하지만 숨쉬질 않는다. 그나마 R은 한국 장르 영화의 주인공치고 엄청나게 찌질하고 비겁해서 독특한 맛이 있는 정도.


[공각기동대]의 '고스트'와 '의체'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영혼 더빙'이라는 개념 역시 이야기의 주된 갈등을 유발하는 소재인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맥거핀에 그친다. 주인공 R과 악역인 사이퍼는 안드로이드의 자아를 더빙해 넣을 수 있는 인간 시온을 사이에 두고 싸우지만, 이야기에서 시온을 아예 빼버려도 똑같이 굴러갈 수 있을 만큼 스토리와 소재의 결합이 허술하다.


시기적으로 분명 [매트릭스]의 영향 역시 받지 않을 수가 없었을텐데, 대안으로 정두홍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중력감 없는 초현실적 액션으로는 충무로에서 정두홍이 최고니까. 그러나 정두홍의 빙글빙글 액션과 카메라 워크의 합이 좋질 않다. 마치 어떻게 하면 정두홍의 멋진 발차기를 감추고 덜 보여줄까를 궁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캐릭터가 불분명한 메인 악역에 그나마 대사도 몇 줄 주지 않았다는 건 사이퍼라는 캐릭터가 사실상 버리는 카드에 불과하다는 말 밖에 안 된다. 즉, 악당 로봇의 이야기 역시 [블레이드 러너]의 분위기를 대충 흉내내기 위해 빌려왔을 뿐.


R이 리아를 뒤에 태운채 바이크로 폭주하며 소리지르는 장면에서는 [천장지구] 마저도 오버랩된다. 90년대 홍콩 영화에서 영향받아 2천년대 초 까지 한국 TV에 많이 나왔던 소위 "뮤직 드라마"적인 감성.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에서 빌려온 그럴듯한 설정과 비주얼로 한껏 치장한 뮤직 드라마에 가깝다. 다만 보통 15분 내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 뮤직 드라마를 두 시간으로 늘리고 돈을 좀 많이 썼을 뿐이다.


"영향 받음"과 "베낌"의 경계는 사실 뚜렷하지 않다. 다만 그것을 나누는 것은 어쩌면 "빌려온 요소" 외의 나머지 부분, 즉 작품만의 고유한 영역에서의 성과를 기준으로 해야할지 모른다. 즉, 다른 작품의 요소들을 짜깁기 했어도 그 조화가 좋거나 나머지 부분에 매력이 있다면 작품들 간의 영향력을 주고 받는 계보를 형성하게 하지만, 다른 작품의 요소들 외에 아무 것도 없다면 그건 명백히 그 작품 자체만 두고 평가할 여지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연출 각본 민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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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더카니지 2016/12/30 18:01 #

    쉬리의 흥행 이후 블록버스터 제작 열풍이 불었던 흑역사 시절의 작품...아유레디, 예스터데이, 흑수선 등등 수십억 쏟어부은 이른바 영화들이 쏟아져나왔고 성냥팔이소녀의 재림으로 거품이 펑 터졌죠. 저 시기에 그나마 건질 영화는 2009 로스트 메모리 정도?
  • 루트 2016/12/30 19:47 #

    저는 이 영화를 인상깊게 봤었습니다. SF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 꾼 조잡한 꿈 속을 돌아다니는 느낌이 들거든요. 조잡한 건 조잡한 거지만, 어디가서는 못 볼 구경거리인거죠.
  • 남중생 2016/12/31 00:44 #

    저도 이쪽 평에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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