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지구 The Quiet Earth (1985) by 멧가비


정체 불명의 과학 실험, 그 한 순간의 실수가 불러온 인류의 증발. 설정 면에서 [나는 전설이다] 혹은 [미스트]를 연상할 수 밖에 없는데, 오히려 영화는 절망적인 인류 멸망의 세계관을 다루면서도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절망이나 폭력이 아닌, 근거없는 희망과 몽환적인 분위기가 더 돋보인다.


제목부터가 아이러니하다. 때는 핵의 공포가 남아있던 냉전시대, 그토록 시끌시끌했던 지구가 한 순간에 조용해졌는데 남은 것은 평화 대신 지독한 고독함이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 넓은 지구를 독점하게 된 자유로움을 즐기기보다는 타인의 체온에 목말라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처럼, 그렇게 박터지게 싸웠어도 결국 인간은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한다는 거다. 이렇게나 쓸쓸한 반전(反戰) 영화라니!


아니나 다를까, 타인을 처음 만날 때의 얼싸안던 화기애애함은 금세 휘발되고 인물 셋이 모이자 금세 긴장감이 조성된다. 그 와중에도 지배 계급을 향한 피지배 계급의 혐오 정서가 표출되며 한 여성을 둘러싼 두 남성의 동물적인 경계심이 발동되기도 한다. 인류 전쟁의 역사를 누군가는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멍청이들이 싸웠기 때문"이라고 정의내리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두 남자가 싸울 때 마다 홍일점인 조안은 "신이 되려하지 말라"며 힐난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작품 내내 그렇게나 갓컴플렉스에 대한 경계를 드러냈는데 셋 중 둘은 결국 아담 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신의 자식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말이다.


결국 잭 홉슨은 스스로를 희생해 아피와 조안을 다음 인류의 조상으로 남겨 놓는다. 표면적으로는 자신보다 책임감 있고 육체적으로 강한 아피를 조안의 파트너로 인정한 것이지만 어쩌면 인류를 파멸로 몰고간 과학을 대표한 사과이기도 할 것이다. 아피와 조안이라는 커플은 인종적 화합이자 계층적 화합이기도 하다. 적어도 남녀 둘만 남았으니 마오리족과 백인간의 계급적 갈등이 존재하진 않을테니 말이다.


조용한 지구라니, 그 참을 수 없는 고독함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반대로 묘한 안도감이 드는 이미지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말이 있듯, 조용한 지구는 어쩌면 가장 평화로운 지옥일 수 있지 않을까.




연출 제프 머피
각본 샘 필스버리, 브루로 로렌스



덧글

  • 파란 콜라 2017/01/16 13:05 #

    이게 뉴질랜드영화였군요..영화 초반부가 인상적이였는데요
  • 멧가비 2017/01/16 19:27 #

    분위기 참 괜찮죠. 그 적막한 느낌은 '나는 전설이다' 시리즈보다도 뛰어났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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