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고지라 シン・ゴジラ (2016) by 멧가비


소문난 지진 보유국답게 일사불란한 시스템 발동, 그러나 겹겹이 쌓인 관료제 구조가 발목을 잡는 등 일본식 재난 대처 시스템의 입체적인 면이 부각되어 재미있다. 극장용 괴수 영화의 딜레마는 긴 러닝타임을 괴수 레슬링으로만 채울 수도 없고, 관객이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인간들의 드라마로 채우면 이야기가 뻔해진다는 데에 있다. 이 영화는 괴수 구경의 나머지를 조금 새로운 것으로 채운다.


거대 괴수물 혹은 재난물을 통틀어 손 꼽히게 차분하고 논리적인 영화다. 겁먹어 패닉에 빠진 사람도, 질질 짜는 사람도 없다. 등장인물 모두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재난을 타개하는 일에만 집중한다. 재난물 중 이 정도로 "보통 사람들"의 드라마를 배제한 영화가 또 있었나.


날카롭다 싶을 정도로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블랙 유머적이기도 하다. 당장 민생이 작살나고 있는데 관료들은 회의실을 옮겨 다니며 탁상공론에 바쁘다. 높으신 분들이 감 놓냐 배 놓냐 따질 동안 띨띨하게 생긴 유생(幼生) 단계 고지라와의 조금 쉬운 싸움은 물 건너 간다. 기자회견 중계에 수화통역사까지 갖춘 장면이 웃겼는데, 웃길 게 전혀 없는 장면인데도 웃었다. 영국식 유머 느낌.


고지라가 나올 만하면 흐름 끊고 회의 또 회의. 관료제의 답답함을 굳이 관객에게 체험시킨다. 조용필은 마지막에 나온다고 했던가. 슬슬 부아가 치밀 때 쯤 되니까 고지라가 짧고 굵은 본격 쇼케이스를 펼친다. 꼬리만 살랑거리지 우두커니 서 있기나 하는 멍청이인 줄 알았는데 공격력은 역대 최강이다. 멋지다는 생각과 함께 도시가 파괴되다 못해 걸레짝이 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답기 까지 하다. 파괴의 미학이란 이런 거구나.


와신상담 12년만의 정식 타이틀이면 시리즈 연장의 욕심을 부려 정석 플롯으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방향을 틀어 현실 정치를 풍자한 용기가 대단하다. 자국에서 장르 자체의 쇠락도 있지만, 스케일로 조지는 블록버스터로서는 이미 헐리웃에 주도권을 뺏긴 점을 완벽히 자각하고 있다는 거겠지.


일본 현지의 고지라 팬들에게는 어떤 의미의 영화일까. 끝내주는 파괴력과는 별개로 고지라의 진화, 즉 성장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재앙의 신이 아닌, 이해 가능한 생물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것이 어쩌면 오히려 롤랜드 애머리히의 "질라"보다도 더 격하된 셈이니 말이다. 에머리히의 영화를 싫어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번의 새 고지라가 마음에 든다. 특히 유생 단계의 아가미는 "바다에서 올라온 괴물"이라는 설정에 설득력을 부여하며 "진화"를 관찰하는 시각적 흥미를 제공한다. 뭐가 됐든 '미니라'는 완벽히 부정당했다.


'디스트로이어'가 등장한 95년작을 모티브로 삼은 흔적이 보이고, 영화의 톤에서는 봉준호 [괴물]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근엄함과는 거리가 먼 대신, 병 든 듯 위태로워 보이는 디자인이 인상깊다.


장담점이 또렷이 보이는 영화다. 흥미로운 위기대처 시뮬레이션을 보는 맛은 있지만 지나치게 설명이 많아 두 시간 짜리 설정집을 보는 듯한 지루함 역시 있다.




연출 각본 안노 히데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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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포스21 2017/03/09 18:34 #

    듣자니 이거 애니버전의 후속편이 기획되고 있다는 데 어떨지 궁금하네요
  • 멧가비 2017/03/10 16:01 #

    탄력 받았나보군요. 기대되네요.
  • 잠본이 2017/03/11 15:01 #

    근데 각본이 우로부치 겐이라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가 예상되는...
  • 잠본이 2017/03/10 00:47 #

    안노가 만들었다고 해서 뭔 농담같은 일이 다 일어나나 싶었는데 대박 쳤다고 해서 이건 농담이 아니라 무슨 꿈인건가 하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 멧가비 2017/03/10 16:02 #

    그런가요. 전 에바 TV판만, 그나마 난해해질 때 쯤 접었어서 그런지, 정말 에반게리온 같은 영화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 잠본이 2017/03/11 15:01 #

    아니 영화의 만듦새 문제가 아니고 제작사가 용케도 안노에게 맡길 생각을 했구나 하는 점에서 말이죠(...)
    이양반 그동안 찍은 실사영화라고 해봐야 자주제작 레벨을 벗어나지 못했던지라
  • 멧가비 2017/03/11 16:51 #

    그럼 결국 감독의 덕력에 모든 걸 건 셈이군요.
  • 엔토류아 2017/03/10 00:50 #

    기자회견 수화통역 관련해서는 지난 동일본대지진 당시에 청각장애인 분들도 재해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수화통역을 세우기 시작한 걸 반영한 것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 멧가비 2017/03/10 16:04 #

    물론 그 장면이 이상해서 웃은 건 아닙니다. 현실 반영이든 영화 속 설정이든 간에, SF 레벨의 재해 와중에도 지킬 건 꼼꼼하게 참 잘들 지키는 점이 언밸런스해서 재미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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