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 King Kong (2005) by 멧가비


1933년 [킹콩] 원작은 피터 잭슨을 감독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전범이다. 리메이크 판에 그의 순정이 절절이 담길 것은 예측된 일이었다. 원작에 대한 지나친 존경심을 참을 수가 없던 그는 영화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에게 스토리와 드라마를 부여하기로 마음 먹었을 것이다. 팬이라는 사람들은 한 작품을 오래 마음에 품다 보면 작품 속 인물들의 전후 사정 까지 머릿 속에서 만들어내곤 하기도 하니까. 덕분에 러닝타임은 세 시간에 주인공인 콩은 함흥차사, 영화의 구조는 완벽히 두 파트로 분리해도 무방하도록 나뉜다. 킹콩의 로맨스, 그리고 벤처 호 선원들의 모험.


벤처 호의 모험 파트는 원작에서도 관객들을 흥분시켰던 중요한 부분이니 배제하거나 축소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피터 잭슨의 B급 호러 연출자로서의 재능이 신들려 날뛰는 파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릴라가 연애하는 세 시간 짜리 팬픽에 부속처럼 달려있는 한계를 면치 못한다. 차라리 그 파트만 뚝 떼어다가 한 편의 크리처 호러 영화로 독립 시켰더라면 더 그럴싸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선원들에게 부여된 스토리와 드라마도 사족이 아니었을텐데.


콩 파트는 크게 새로울 것도 없고 잭슨으로서도 재해석 할 부분이 아니었으리라. 원작에 대한 존중 때문이기도 하지만 앤에 대한 킹콩의 집착과 그 행보 자체라는 단순한 이야기 자체가 곧 영화의 전체이기 때문에 조금만 건드려도 영화가 아예 달라질테니까. 리메이크 판에서도 여지없이 뻔한 "미녀와 야수" 이야기다. 둘 사이에 화학 작용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재해석이 들어갔으나 이야기의 구조 자체는 유지된다.


(76년 리메이크 판에는 없는) 콩과 공룡의 싸움은 원작과 이 영화를 통틀어 액션 시퀀스로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리메이크 되면서 세 마리로 늘어난 공룡과 뒹굴거리며 고군분투 하는 모습은 기막힌 볼거리다. 고릴라가 성룡 흉내를 내고 있는데 재미가 없을 수가 없지.(그 와중에 앤의 경이로운 강철 체력도 인상 깊다.) 하지만 해당 시퀀스의 가장 중요한 정서는 사라진다. 원작에서는 정글의 야만성과 무자비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콩이 그 야만성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액션은 더욱 정교, 화려해지며 콩은 마치 드래곤에게서 공주를 구하는 기사처럼 재해석 된다. 그 자체는 좋다. 하지만 콩의 야만성을 제거함으로서 영화 전체의 정서를 해치기도 한다.


콩은 "난 쟤들과는 달라" 라는 식의 고고한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정작 하는 짓은 똑같다) 그리고 해골섬은 미녀를 탐하는 마초들로 가득한 슬럼가다. 콩에게서 야만성을 제거할 것은 결국 콩이 뉴욕에 끌려오는 설정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대도시에 소환되어 길을 잃고 날뛰는 원시의 야만성, 같은 것이 아닌, 그냥 고릴라의 탈을 쓴 로맨틱한 남자 하나가 타향에서 서럽게 죽었을 뿐이다. 이 버전의 콩은 해골섬에서 앤을 데려가지 못하게 싸우다가 죽는 게 캐릭터의 완성이지 않았을까.


영화는 참 좋은데 정작 주인공 콩은 마음에 들지 않는 기묘한 리메이크다. 털복숭이 대왕 고릴라가 속옷만 입은 금발 미녀에게 집착하면서 플라토닉한 척 하는 위선이라니. 차라리 확실하게 변태 같았던 76년 작의 콩이 낫다. 제시카 랭처럼 페로몬을 흘리고 다니는 게 콩이 흥분해 날뛰는 이유로도 더 그럴듯 하고. 고릴라와 인간의 우정? 그럼 [마이티 조 영]을 리메이크 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연출 각본 피터 잭슨
원안 메리안 C. 쿠퍼, 에드거 윌리스 (King Kong,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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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포스21 2017/03/10 21:19 #

    음, 확실히 콩과 여주의 관계는 좀 애매하달까? 약간 껄끄러운데가 있더군요
  • 멧가비 2017/03/11 16:53 #

    피터 잭슨이 약간 자기 팬심에 뻑 간 과잉해석 같았습니다.
  • 잠본이 2017/03/11 15:27 #

    앤의 강철체력은 숱한 폭발속에서도 로보의 대가리에 매달려 잘도 버티는 쿠사마 다이사쿠에 버금가는(...)
  • 멧가비 2017/03/11 16:54 #

    거대 로봇에 직접 타는 놈들도 대단하죠. 현실이라면 걷기만 해도 멀미에, 엉치뼈 작살날텐데.
  • 잠본이 2017/03/11 22:13 #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주인공 보정의 힘이란 참 대단합니다.
  • 멧가비 2017/03/12 14:25 #

    SF는 과학에서 영감을 얻지만 동시에 과학을 무시함으로서 장르의 역사를 쌓은 셈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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