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1992) by 멧가비


권력은 권력 스스로 태어나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부조리한 권력은 그 권력에 희생당하는 구성원들 스스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그것이 무지함에서 비롯되었든 아니면 그릇된 신념의 결과이든, 결국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존재하게 된다. 영화 속 엄석대의 학급은 그런 권력의 부조리가 흥망성쇠하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엄석대가 재미있는 것은 철권 통치의 단순한 권력 깡패가 아니라 그 자신 또한 권력에 빌붙는 기회주의자였다는 점이다. 담임 교사에게는 학급의 효율적 관리라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편의를 제공함으로서, 석대는 급장을 넘어 교사에 준하는 초월적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런가하면 여태까지의 아이들과 달리 자신의 권위에 의문과 반감을 표하는 병태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한다. 전반부의 교사, 석대, 병태의 관계는 마치 해방 이후 미군과 잔존 친일 세력 그리고 독재 정권과 타협한 지식인들의 역학 관계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런가하면 아직 어린 병태는 민주주의라는 단어도 모르면서 민주주의가 실종된 학급 분위기에 실망하고 분노한다. 되찾을 방법 역시 모르지만 분노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고있다. 하지만 병태가 호소하는 대상인 학급의 다른 친구들은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하며, 독재 정권 시대의 기성세대인 병태의 아비는 병태를 나약해빠진 녀석이라며 나무란다. 혼자 알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되어 버리는 형국. 게다가 병태는 어리석을만큼 순진하기까지 했다. 석대의 권력이 그저 급장이라는 타이틀에만 국한되어있을 거라는 발상, 저금통을 깬 용돈이나 차기 급장 선거 따위로 석대를 중심으로 왜곡된 권력 구조를 깨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믿음이 말이다.


열흘 붉은 꽃 없듯이, 어찌됐든 엄석대의 시대는 그가 "빌렸던" 권좌의 새 주인을 맞이함으로서 갑작스럽게 그리고 초라하게 끝난다. 세상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엄석대 저 새끼 나쁜 새끼라며 욕하는 아이들은 그 전 까지는 석대를 영웅처럼 혹은 왕처럼 떠받들던 피지배계급이었다. 아이들은 폭력 아래에서 숨죽여 지배를 받았지만 동시에 자신들 위에서 폭력으로 군림할 누군가를 늘 필요로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엄석대의 몰락은 그저 그 자리의 원래 주인인 (군부 독재 시대의) "교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석대는 정의의 심판을 받은 게 아니라 용도 폐기됐을 뿐이다.


철권이 녹슬면 기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철권을 들여오며 고개를 조아린다. 철권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가까이 있다보면 떨어진 콩고물을 주워먹을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올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일 수도, 그런 타산적인 욕망이 아니더라도 그저 그것에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제는 나이 든 그 시절 엄석대의 부하들이 다시 엄석대의 시대가 오기를 갈망하는 모습은, 그래서 영화의 백미이면서도 가장 씁쓸한 장면이다. 부조리를 물리치면 그 자리에 다른 부조리가 들어선다는 개념은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당장 이 나라는 유신 정권의 망령을 다시 권좌로 불러들인 일이 있었질 않는가.


신선한 음식을 얻어도 냉장고가 불량하면 금세 못 먹게 되어버린다. 좋은 것은 그 담는 그릇도 좋아야 한다. 역사의 부조리를 바로잡을 기회를 얻고도 단 10년만에 사악한 협잡꾼에게 도로 빼앗겼다. 협잡꾼 가니까 유신에서 태어난 탐욕스런 광신자가 왔다. 광신자가 법의 처벌 앞에 놓이자 그를 동정하며 우는 광신자의 노예 집단들 꼬라지를 보면 단지 사람 하나를 바꾸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연출 각본 박종원
원작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