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후의 현재 문제점 by 멧가비


연속극은 영화에 비해 플롯보다는 캐릭터의 힘으로 추진력을 얻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닥터후처럼 옴니버스 구성으로 된 드라마라면 더욱 그러하며, 특특히 10년이 넘은 시간, 시즌10을 달리고 있는 장수 드라마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닥터후는 현재 그 캐릭터들에게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이 없다. 닥터와 컴패니언, 두 주인공에게 일관된 서사가 없고 뚜렷한 개성이 없다.


12대 닥터 그리고 컴패니언에 빌 포츠. 그 이전 닥터, 컴패니언들과는 어떤 점이 다른 걸까.
요약하자면, 기승전결 그리고 일관성의 문제다.


■ 9대 닥터

시간전쟁에 대한 회한, 마지막 타임로드로서의 외로움, 달렉에 대한 분노 등의 정서가 눈에 띄게 유지된다. 뉴 시즌 첫 닥터, 즉 비교 상대가 없었던 만큼 모든 말과 행동이 곧 일관성. 출연 자체가 짧아 캐릭터가 방향을 잃을 여지가 아예 없었다.

'전쟁의 닥터'라는 설정이 아직 없었던 시기이니만큼, 최후에 로즈를 위해 희생하며 재생성(죽음)을 선뜻 받아들인 건 어둠으로 가득했던 닥터에게는 일종의 안식이었을 것이다. 즉, 시즌1은 시간전쟁을 겪은 닥터가 지구인 로즈를 만나 구원을 얻고 죽음을 통해 그 어둠에서 해방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 로즈 타일러

뉴 시즌 첫 컴패니언으로서, 시청자를 대신해 시간여행과 닥터를 바라보는 관찰 대리인. 닥터에 대한 동경과 우주에 대한 호기심, 돌발 행동 모두가 시청자의 아바타와도 같은 역할에 가까웠다. 동시에 타임로드가 바라보는 지구인의 열등함(?)과 순수함을 대변하기도.

시즌2로 넘어가면 닥터와 로맨스 노선을 타면서 역할이 변경된다. 성장한 컴패니언으로서 닥터와 대등한 파트너쉽을 보여주는 것이 시즌2의 전체 줄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루한 생활에 찌들어있다가 닥터를 만나 시간여행을 겪고, 닥터를 사랑하게 됐지만 결국 헤어졌으며, 다시 돌아간 지루한 세상에서는 사망자처리, 평행 차원에 건너간 뒤 닥터의 분신(the hand)과의 만남으로 로맨스를 완성하는 서사가 완벽하다. 이는 곧 10대 닥터의 전 시즌을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 10대 닥터

9대가 가졌던 비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로즈와의 로맨스, 인간 찬가 등을 통해 "명백히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일종의 "내가 다 구하겠다" 갓 컴플렉스.

로즈와 헤어진 이후 미묘한 삐딱함으로 마사에게는 상처를 준다. 마스터 사건 후부터는 외로움이 점점 심해지면서 타임 패러독스를 우습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마침 해당 시기에는(에피소드 410) 그렇게 아끼던 인류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의 죽임이 예언되는등 정서적으로 벼랑 끝에 몰리기도 한다. 재생성 직전의 명대사 "I don't wanna go"는 10대가 겪었던 정신적 고통을 함축한다.



■ 마사 존스

뉴 시즌 2대 컴패니언으로서 로즈와는 대척점에 선다. 닥터를 만나기 전에는 예비 의사로서 충분히 자부심 가질만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으며 닥터에 대한 사랑은 철저히 외면당한다.

시간여행에 동참한 것은 닥터에 대한 동경 때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마사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처음부터 온갖 사건해결에 톡톡히 제역할을 하지만, 반대로 무력화된 닥터를 위해 진창을 구르듯 희생하기도 한다. 로즈가 철 모르고 용감했다면 마사는 스스로의 똑똑함을 믿고 용감한 쪽.

마스터 사건을 통해 작은 행성의 지식인으로서의 좁은 세계관이 무너지는 무력감을 느낀다. 닥터로부터 받은 상처도 크다. 시즌2는 파행 가정에서 리더쉽과 책임감을 맡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거추장스럽게 여기기도 했던 마사가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 도나 노블

다시 한 번 마사와는 대척점에 선 컴패니언. 비정규직에 노처녀로서 자존감 바닥으로, 정식 컴패니언으로서 재등장할 때는 이쪽에서 먼저 닥터를 찾아헤메고 있던 상황. 또한 로즈, 마사와 다른 점은 시간여행에 참여한 동기인데, 닥터에 대한 관심보다는 "지구를 떠난다"는 일종의 "자아 찾기"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로즈가 현실이 따분해 훌쩍 떠났다면 도나는 현실이 괴로워 제발 떠나고 싶어했던 쪽.

그런 컴패니언을 위해 시즌 4에서 준비된 서사는 "온 우주가 도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 급기야 "닥터 도나"가 되어 정말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고야 마는데, 결국 기억은 잃었지만 회복된 자존감은 남았을 것이며, 닥터를 만나기 전 최고의 목표였던 결혼에도 성공한다. 흐름 좋은 수미쌍관이다. 시즌4는 철저히 현실에 있을 법한 한 여성에게 있었던 백일몽 같은 이야기이다.



■ 11대 닥터

개구쟁이와 지친 노인의 양면성을 가지는데, 스토리 면에서도 폰드 커플과 삼총사를 이뤄 정말로 "모험"하듯 시간여행을 즐긴 파트와 "트렌잘로어"로의 행선이 예고된 무거운 파트가 혼재한다. 9대에서부터 이어진 시간전쟁의 죄책감을 잊은 건 아니지만, 당면한 자신의 죽음 문제에 더 몰두하기 때문에 10대와는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변화한 좋은 흐름.

시즌5에서 7까지의 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밀해서 이미 기승전결이나 일관성을 논하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스티븐 모팻의 스타일은 호불호 크게 갈리나 11대가 활동하던 모든 시즌, 그 모든 꼬인 시간들을 결국 하나의 떡밥으로 관통시키는 기획력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렇듯 완벽한 서사와 일관성을 가진 닥터지만 단 한 가지, 죽는 타이밍이 나빴다. 자세한 건 아래 클라라 부분에서 후술.



■ 에이미 폰드 (+로리 윌리엄스)

"부모를 되찾고 로리와의 사랑을 완성한다"가 곧 에이미의 기승전결이다.

앞의 셋과 달리 가족이 없는 채로 등장했지만 오히려 가족이라는 테마와 가장 관련이 깊은 컴패니언. 결혼 전야에 여행을 떠나 결혼식을 거쳐, 아이를 낳고, 헤어졌다가 화해하는 등의 가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 컴패니언은 뉴 시즌 최초다 이는 닥터를 만나 부모를 되찾고, 닥터 때문에 로리를 버리려 했지만 결국 최후에는 로리를 위해 닥터와 가족을 등지는 결론으로 회귀한다. 

그 닥터와도 가족으로 엮인다는 점이 포인트. 뉴 시즌 들어 처음으로 닥터에게 공식적인 가족이 생긴 시기이기도 하다.



■ 리버 송

이쪽도 일관성을 굳이 따질 의미가 없다. 모든 생애가 닥터를 위해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



■ 클라라 오스왈드

본체가 아닌 '에코 클라라'로서 첫 등장. 클라라가 가진 드라마 캐릭터로서의 임무는 "닥터의 모든 생애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 닥터와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고 어떻게 결론을 내느냐가 목적지인 셈이다. 닥터가 클라라를 알기도 전에 이미 클라라로 인해 현재의 닥터가 존재한다는 설정은, 일단 만난 이후부터 인연을 쌓았던 이전 컴패니언들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폰드 부부의 하차 이후 뚜렷한 줄거리 없이 소모될 수도 있었던 11대 닥터의 남은 시즌들에 새 숨을 불어넣는다. 허탈감에 빠져있는 닥터에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 상대가 나타난 것. 드라마는 여기서 닥터의 죽음, 시간전쟁의 실체 그리고 새로운 로맨스라는 카드를 꺼낸다. 하지만 닥터 역 맷 스미스의 조금 이른 하차로 로맨스 서사는 채 전개도 해보기 전에 강제 종료되고 만다.

상기했듯 '클라라 오스윈 오스왈드'라는 캐릭터 자체가 마치 아귀가 딱 맞는 톱니바퀴처럼 시즌7의 닥터에게 맞춰진 채로 기획됐다. 그런데 그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에 클라라라는 캐릭터는 목적지를 잃었고, 11대는 자신을 위해 삶의 모든 순간을 내던진 클라라를 앞에 두고서 에이미의 환영을 보며 죽음을 맞는다. 클라라는 11대의 컴패니언으로 만들어졌는데 11대의 컴패니언은 결국 에이미였던 셈이다.

스윗하게 져주던 동년배의 닥터가 사라지고 고집센 노인이 등장하자 당차고 똘똘한 성격으로 닥터를 (연애하듯) 리드하던 성격은 "통제광"으로 변질되어 있지도 않았던 괴팍함을 느닷없이 드러낸다. 한 마디로, 상성이 나쁘게 된 것. 급기야 이성을 잃고 타디스 키를 훔쳐 용암에 던져버리는 초유의 전개가 펼쳐지고 만다. 시즌7의 클라라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 기능을 잃은 캐릭터가 빠질 수 있는 나쁜 길 중 하나다. 여기서부터 일관성의 문제가 쌓이기 시작한다.


11대가 조금 더 연장 출연해서 클라라와의 관계를 마무리하고 동시에 하차하면 좋았을 것이다.



■ 12대 닥터

당초의 컨셉은 클래식 시즌으로 회귀한 "성격 고약한 노인" 닥터였을 것이다.(배우가 노년은 아니지만) 때문에 시즌8 초기에 팬들 사이에서는 발리야드가 자주 언급되기도 했다. 인간에게 우호적이고 비교적 컴패니언에게 져주던 이전의 젊은 닥터 컨셉에서 벗어난 것 자체는 신선했다.

문제는 시즌8, 9가 소위 "클라라후"라고 불릴 정도로 철저히 클라라에게만 포커스를 맞췄다는 점이다. 표면상으로만 남은 닥터의 강경한 성격은 같은 시기에 통제광이 되어버린 클라라와 충돌하게 된다. 12대와 클라라가 함께하는 시즌의 전체적인 불편한 느낌은 일부 여기서 기인한다.


클라라 중심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생긴 문제점들은,

"나는 선인인가?"라는 닥터의 고민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말투만 고약한 노인네일 뿐 실질적인 성품은 이전 닥터들과 다를 바 없게 된 것. 12대의 고유한 캐릭터성이 쌓이질 않고 클라라의 행동에 리액션만 하는 식으로 "끌려가는" 스토리의 연속. 12대가 어떤 캐릭터인지 채 설명이 충분하지 못했는데 각본은 "서로 독이 되는 닥터-컴패니언" 컨셉을 성급하게 밀어붙여 설득력이 떨어지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돌아보면 닥터는 12대 이전에도 이미 컴패니언을 위해 혹은 이름도 모르는 그저 한 명의 지구인을 위해서라도 자기가 안 할 행동까지 불사하는 인물"들"이었다. 클라라 이전의 컴패니언들 역시 닥터든 누구를 위해서든 항상 목숨을 초계같이 내놓는 비범함을 늘 보여왔다. 12대 닥터와 클라라는 같이 있으면 서로를 극단적으로 만들어 우주를 위험하게 만든다!라고 각본은 말하고 있지만 도무지 어떤 부분이 그런지 시청자는 끝내 알지 못했다.

결국 클라라를 잃고 클라라의 기억을 잊고 급기야 리버와의 못다한 이야기마저 마무리지었다. 끌려가던 객체가 끌어주던 주체를 잃어버렸으니 남은 건 닥터라는 이름의 빈 껍데기 뿐. 새로운 컴패니언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꾸려가기엔 12대부터가 도무지 어떤 캐릭터인지 불분명하다. 때문에 시즌10 현재의 닥터는 뭔가 상황이 벌어지면 어떤 닥터라도 했을 법한 최소한의 뻔한 행동만 할 뿐, 이 닥터이기에 가능한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질 못하고 있다. 제작진들도 이제와서 12대를 어떻게 써먹을지 감을 못 잡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새로 등장한 빌 또한 12대 닥터 만큼이나 불분명, 불투명한 인물이다. 개인적 고민이나 뚜렷한 시간여행의 의미 등 이전 컴패니언들의 개성이 되어줬던 요소들이 빌에게는 없다. 심지어 썩 호감가는 성품의 캐릭터도 아니다. 시즌의 절반이 지나도록 닥터와의 관계형성이 전무하며 시간여행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빌의 관점이 묘사되질 않는다. 미시의 남은 이야기와 마스터의 재등장이 떡밥으로서 남아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닥터와 컴패니언이 줬어야 할 이야기의 풍족함을 대신 메꿔주기에는 부족하다.



시즌 10의 실패는 이렇듯 시즌 10만의 문제가 아니다. 닥터와 컴패니언의 이합집산이 조금씩 어긋나면서 선대(先代)가 후대에게 좋은 자리와 좋은 파트너를 넘겨주지 못하는 악순환이 누적된 결과물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닥터후의 수장으로서 이미 모든 걸 다 소진했지만 손 놓을 타이밍을 놓쳐버린 스티븐 모팻. 드라마에 대한 애정도는 시리즈 사상 최고인 배우가 닥터를 연기하고 있는데, 그 배우가 출연한 세 시즌이 연달아 역대 최악을 갱신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덧글

  • K I T V S 2017/06/05 20:20 #

    흐으으ㅠ 이대로 닥터후 신시즌이 끝나면 안될텐데ㅠ
  • 니킬 2017/06/05 20:39 #

    클라라가 '닥터 나빠!!' 할 때마다 그게 잘 와닿지도 않는데다가, 그런 말을 하는게 닥터를 전혀 모르던 캐릭터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전 닥터들의 타임라인을 다 지켜보았던 'Impossible Girl'이었던지라 갈등에 몰입이 되기는 커녕 위화감만 누적되는게 참 답답하더군요.
  • 연꽃소라 2017/06/05 21:27 #

    클라라의 엔딩이 개인적으로 찝찝하게 느껴졌던 게 이유가 있었군요... 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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