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셸 Ghost in the Shell (2017) by 멧가비


전화위복인 걸까. 기존 [공각기동대]의 원작이나 오시이 마모루의 "95년 극장판"에 큰 애착이 없었기 때문인지 되려 아예 별개의 작품으로 놓고 보기가 어렵지 않다. 되도록이면 실사 작품을 조금 더 선호하기도 하고.


사이버펑크 장르라는 게 그 누적된 역사에 비해 다루는 주제의식은 일정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냉정히 감안하면 이제와서 철학적 깊이를 요구하기도 멋쩍어진다. 스토리와 설정은 파격적인 재해석 대신, 기존 작품들에 있던 것들을 조금씩 그러모아 짜깁기 하는 방식을 택했으니 그 역시 평가의 기준으로 삼기 힘들다.


대신 이 영화에는 연출과 각본의 빈곤함 대신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화려한 도시의 이미지가 마지 짝퉁 명품 선물의 포장지처럼 영화를 덮고 있다. 하지만 그 화려함은 도시의 발전 성과나 부유함 등을 나타내는 지표가 아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것은 곧 영화 속 세계관의 천박한 테크놀러지 남용을 상징하는 도구인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주 된 갈등을 만들어내는 테크놀러지에 비하면 그저 광고판으로나 쓰이는 홀로그램은 사실 시대에 뒤떨어진 싸구려 기술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거리에는 사람보다 광고가 더 많고, 그나마 몇 안 되는 행인들조차 광고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심지어 쩍쩍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 위에도 방향 표시는 홀로그램이다. 95년판에서 도시의 폭력성과 대책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구룡성채의 이미지를 가져왔다면, 이쪽의 도시 이미지는(구룡성채도 나오지만) 자기 어필 과잉의 오사카 도톤보리에 가깝다. 화려함이 지나쳐 야할 지경이다. 만화 [고독한 미식가]에서 주인공 고로가 도톤보리를 방문했을 때 가볍게 느꼈던 불쾌감이 이 영화의 도시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슬럼가 뒷골목의 쓰레기처럼, 환락가의 주말 밤거리에 뿌려진 안마방 전화번호 카드 더미처럼, 그런 것들이 온 도시에 흩뿌려져 있다. 영화 속에서 진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는 떠돌이 강아지들 뿐이다. 나는 여기에서 극한의 허무주의를 느낀다.


이는 원작의 '고스트'라는 개념에 대해 영화가 나름대로 재해석하는 바와도 관련이 있다. 원작이나 95년판에서의 고스트는 비교적 "인간성의 상징"에 가깝게 해석된다. 그것을 담는 그릇이 비록 전뇌의 사이보그라 할지라도 고스트의 존재에 기대 마지막 인간성을 지킨다는 것이 주제의식 중 하나였으며, 때문에 고스트만 있다면 그것을 담는 그릇이 무엇이든 인간성을 가졌다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추가적인 질문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의 고스트는, 고스트 그 자체에 대해 묻는다. 고스트라는 것이야말로 실체가 있는 개념이냐는 거지. 생물학적인 뇌였을 때 저장한 순수한 기억인지, 아니면 그저 기억 데이터와 프로토콜 등 복잡한 연산의 산물인지를 영화는 묻는다. 물론 답을 내리진 않는다. 답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거리의 이미지와 고스트에 대한 해석에 비춰보건대, 비교적 독자와 관객들에게 고민할 여지를 남겨줬던 전작들(?)에 비해 영화는 허무주의의 무드를 구체적으로 던져준다. 역시 서양적인 관념을 거치면 뭐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변한다. 귤이 회수를 건넜더니 탱자가 되고 원산지에 수확 날짜 까지 표기된 느낌이다.


영화의 이야기적 완성도를 논하는 평가들을 다 차치하고서라도, 시각적인 면에서는 장르사에서 하나의 지표가 될만은 하다. [블레이드 러너] 이후 하나의 관념처럼, 흔히 "사이버펑크"하면 떠올리게 되는 클리셰적 이미지들이 있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그것들을 적극 차용한 "이름있는" 영화가 잘 떠오르진 않는다. 기성품 사이버펑크 이미지들을 집대성한 일종의 "도감" 같은 역할로서도 이 영화를 기억해 둘 최소한의 가치가 있다.


단 한 가지, 진짜 구리다 싶었던 건 마치 슈퍼히어로 영화의 1편같은 그 마지막. 아 진짜 그건 좀 아니다.





연출 루퍼트 샌더스
각본 윌리엄 윌러
원작 시로 마사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