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 (2017) by 멧가비


초반 몰입도를 겪으면서는 이소룡의 "절권도"가 떠오른다. 절권도를 일종의 철학으로 풀이할 때, "쓰지 않을 동작은 버리라"는 말을 이소룡은 곧잘 하곤 했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다. 이른바 "감초"라는 이름으로 관습처럼 투입되는 코미디 담당 캐릭터가 없고,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리기 위해 갑자기 지능이 떨어져 뻔한 함정에 빠지는 등의 속 터지는 전개도 없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녀 두 주인공이 티격태격 하다가 어느 새 사랑에 빠진다는 시시껄렁한 플롯을 배제한 것이 가장 좋다. 몰입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로만 채워졌음에도 밀도는 높다.



잘라 말하면 맥거핀 투성이다. [사망유희]의 이소룡이 사망탑을 오르며 새로운 고수들을 만나듯, 맥거핀 하나가 나타났다 사라지면 또 다른 맥거핀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구성으로 16부가 채워진다는 인상도 받는다. 하지만 그저 트릭을 위한 장치로서 맥락없이 쑤셔 넣어지지 않으니 말하자면 좋은 맥거핀. 지나고보니 맥거핀이었던 전개 하나 하나가 전부 주제의식과 관련이 있고 드라마 전체의 톤을 해치지도 않는다. 전혀 무관한 사건이 메인 스토리에 유기적으로 녹아들거나, 메인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촉매로 작용하기까지 하는 그 필력이 대단하다. 박무성 살해 진범이 좁혀지고 체포되는 과정은 그런 스마트한 필력의 극한.


원점회귀 구조는 더 좋다. 극 초기에 검은 배후로 이창준이 가장 먼저 주목받는데, 다른 사건들이 연이어 개입하면서 긴가 민가 상태를 지나 결국 이창준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창준이라는 캐릭터의 성격과 그를 바라보는 관점은 180도 뒤집히니 상태. 처음부터 이창준을 생각했음에도, 내가 뭐랬어 이창준 맞잖아, 라고 할 수 없게 돼 버린다. 사전 제작 드라마의 미덕과 가능성을 단 1퍼센트도 낭비하지 않고 집약적으로 쏟아부은 캐릭터다.


비단 이창준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캐릭터들의 묘사도 깊다. 흔히 등장하는 사회 악으로서의 부패 검경, 재벌 등이 사소하게 께름직한 소시민적 인물들과 한 드라마에, 한 사건에 엮여있다. 한경위의 상사인 팀장이나 박경완 처럼, 평가하기 미묘한 회색 영역의 캐릭터가 존재하는 건 드라마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한다. 심지어 그 황시목 조차도 학창시절의 과오를 짊어지고 산다. 두부 자르듯 선악을 구분하지 않아서 좋다.


배두나는 언제나 좋았지만 여기서 정점 찍는다. 위에서 "코미디 캐릭터"의 부재를 말 했는데, 그들이 긴장감을 이완시키고 숨을 돌리게 해 주는 역할이라면 여기선 배두나가 그걸 한다. 코미디 캐릭터는 아니고 심지어 사건 수사의 주체인 두 주인공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관찰자의 역할도 겸한다. 다른 캐릭터들이 정말 극의 "캐릭터"라면 배두나는 혼자 "사람"처럼 행동한다. 직업이 경위일 뿐이지,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 도난 신고를 하면 지구대에서 온 경찰 중에 저런 사람 하나 쯤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력 부족이라는 말이 아니라, 배두나에게만 그런 포지션이 부여된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해낸 거고.


아이러니하달까, 씁쓸한 것. 조승우의 황시목은 감정과 욕망이 배제된, 마치 기계처럼 일처리를 하는 게 시그니처인 인물이다. 저런 SF적 인물이기에 가능한 시도와 일 처리 등이 극의 전개를 속시원하게 하는 면이 있지만, 저런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하겠구나 하게 만드는 현실 감각이 뒤따라오면 씁쓸해진다. 그래서 황시목은 이상이자 동시에 현실이다.




그 외 단상


1.
적어도 수도권에서 한 사람의 하룻 동안 동선을 CCTV로 훑는 것 쯤 일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섬뜩하다. 예전에는 [1984] 같은 디스토피아 장르에서나 볼 법한 일이 현실이 됐다. 드라마에서처럼 완벽한 동선을 체크하는 게 가능할지는 몰라도, 저런 설정이 딱히 SF도 아닌 드라마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다는 점이 중요하겠지.


2.
황시목이 진짜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캐릭터였으면 드라마가 조금 더 내 취향이었을 거라 아쉽다. 사이코패스가 소시오패스 잡는 이야기면 멋지잖아.


3.
커피 PPL이 뜬금없는 듯 자연스러워서 웃기다.


4.
영은성의 죽음은 각본 단계에서 이미 허술했다.


5.
드라마 최대 단점. 이경영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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