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라 vs 킹기도라 ゴジラvsキングギドラ (1991) by 멧가비


쇼와 시대의 시리즈야 그렇다 쳐도, 분위기를 일신했던 헤이세이 시리즈에서 23세기 미래 인류와 타임머신이 등장해버린다. 미래에서 온 방문자 중에는 ([에일리언] 시리즈의 애쉬와 비숍을 섞은 듯한) 안드로이드도 포함되어 있다. 과연 이 시리즈는 진지할 만하면 한계를 돌파하고 폭주하는 저주 같은 게 씌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전작에서 살인 식물까지 나온 마당에 뭔들 어떻겠냐만.


비키니 핵실험의 영향으로 돌연변이 하기 전의 고지라, 즉 원본인 공룡을 찾아내 제거함으로써 고지라의 탄생을 미연에 막겠다는 아이디어. 새라 코너 대신 고지라일 뿐, [터미네이터]의 영향이다. 안드로이드가 불꽃을 헤치고 나와 주인공 일행을 추격하는 장면까지 가면 명백하다. (그런데 어째선지 해당 장면의 연출은 '츠카모토 신야'의 초기 단편 컬트 영화들에서 빌려온 듯 하다.)


이야기는 수상하게 흘러간다. 애초에 그 공룡부터가 태평양 전쟁의 한 전투에서 미군을 격파하고 일본 군대를 구원했다나. 미래인들의 음모로 사라졌던 고지라가 돌아와 킹기도라를 물리치는 부분까지 가면 섬뜩해진다. 그 킹기도라를 풀어놓은 "나쁜" 미래인들은 전부 백인들이질 않나! 영화는 고지라를 서구에 맞서는 구원자로 설정하면서 자신들은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라는 물타기를 은근슬쩍 시도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쯤되면 원폭의 공포와 일본 전범의 광기를 의인(?)화 했던 원조 고지라에 대한 모욕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영화의 진짜 내용은 고지라가 킹기도라를 물리친 이후 부터. 언제 구원자였냐는 듯, 더 강해진 고지라는 더 매섭게 도시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태평양 전쟁 참전 장교 출신인 노인 사업가는 고지라라는 메시아의 귀환에 감격했던 것도 잠시, 역시나 괴수는 괴수일 뿐인 사실만 증명하는 파괴의 현장에 휘말리면서 허망하게 숨진다. 이는 구원자를 넘어 어린이 관객들의 우상으로 까지 변질됐던 쇼와 고지라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해, 좆까 그런 거 없다, 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대가리가 터져 죽었던 킹기도라가 미래의 기술로 사이보그화 되어 다시 돌아와 이번엔 도시를 지키기 위해 고지라에 저항한다. 영화 한 편에 터미네이터 1, 2편의 플롯이 모두 들어가 있는 셈이다!)


영화의 묘미가 거기에 있다. 꽤나 진지하게 고지라 구원자 설을 미는 듯 하다가 한 방의 반전. 잊고 있던 핵의 두려움과 전범의 망상, 그 원초적인 공포를 다시금 상기시키기 위해 고지라를 불러왔던 것이다. 여기서의 새로운 고지라는 소련 핵잠수함의 영향으로 태어난 것. 그렇다, 태평양 전쟁은 끝났지만 냉전의 불안함이 시한폭탄처럼 도사리고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묘한 것은, 영화가 개봉했던 해 그리고 같은 달에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냉전도 종식됐다는 사실)


냉전의 불안함과 더불어 영화에 투영된 것은 버블 경제 끝자락의 일본의 자의식이다. 80년대부터 이미 헐리웃 영화에는 "일본의 경제 침공"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종종 감춰져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역으로 서구 열강의 미움을 살 수 있다는 발상을 전제로 한다. 저 미래인들이 고지라를 제거하고 킹기도라를 앞에서 일본을 멸망시키려 했던 것 역시 같은 이유. 미래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21세기 일본의 부는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대륙 등을 모두 사들일 정도로 축적되어, 세계의 경제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고 한다. 버블이 사실상 꺼진 시점에 나온 영화에서 하기엔 다소 허무한 해몽이 아니었을지.


어쨌거나 영화는 뚜렷하게 심어놓은 메시지들도 따지고 보면 공염불이고, 결과적으로는 시간여행 코드를 통해 54년 원작의 사건만 역사에서 지운 꼴이 됐다.



전작에서 중요한 조연이었던 사에구사 미키가 재등장. 파괴의 장소는 후쿠오카를 거쳐 삿포로를 지나 신주쿠(!)에 이른다. 그렇다. 역시나 도쿄 도청이 파괴된다.






연출 각본 오오모리 카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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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의 TV 특촬 팬들에게는 영원한 캡틴이자 영원한 오얏상인 배우 코바야시 아키지가 노년의 모습으로 출연한다. 정부 관료인 츠치아시 유조 역.



덧글

  • rumic71 2017/08/30 15:37 #

    겸해서 X성의 통제관이었던 쓰치야 요시오가 일본군 역으로 나오는 아이러니.
  • 음음군 2017/08/30 15:50 #

    미래에서 온 두명의 서양인 간부(?)의 국적이 무엇인지 안나왔지만, 분위기만 보면 미국하고 러시아같았습니다..
  • rumic71 2017/08/31 15:43 #

    그러고보니 '84고지에서는 아예 대놓고 미국 대사와 러시아 대사가 나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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