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 by 멧가비


거의 모든 "장르 이름"이 조금씩은 모호한 구석을 내포할텐데, 그 중에서도 '사이버 펑크'라는 장르는 특히나 그 대상이 특정되지 않는 성질이 강하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편의에 의해 고안된 기술이 고도로, 또는 극단적으로 첨단화(CYBER)된 세상과 그에 반(反)하는 국외자 혹은 부적응자(PUNK)에 대한 이야기"라고 정의 내린다. 이 영화가 사이버 펑크 장르의 야훼 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담 정도는 되는 대접을 받는 것 역시 그러한 주제의식을 하나의 경향으로 승화시킨 부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쫓는 자인 릭 데커드와 쫓기는 자 로이 배티는, 수사 조직의 말단 그리고 탈주 조직의 리더라는 점에서 대비된다. 하지만 그 둘은 영화 속 세계관에 대한 부적응자들이라는 점에서 동류이기도 하다. 세계관 설정은 그 둘을 다르다 하지만 영화의 실제적인 묘사는 그들의 같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로이의 지구 잠입 목적으로 연결된다.


로이(와 그가 이끄는 넥서스6 탈주자 무리)는 표면적으로 수명 연장을 위해 지구에 잠입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권리 주장"일 것이다. 인간의 일을 대체한다는 건 곧, 그것이 본래 인간의 일이라는 뜻이다. 즉, 인간의 일을 하고 인간과 똑같은 생체 구조로 이뤄져 있으며, 눈으로 본 것에 감정을 이입하는 "정서"를 갖는 등 인간과 다를 것이 없음에도 단지 자궁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도구 취급 받는 처지, 이에 로이는 의문을 제기하고 반기를 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직접적인 분노는 자신의 부모격인 타이렐 회장과 그 휘하 제작자들에 의해 인간성을 부정당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에피쿠로스는 "죽음과 관련된 고통은 죽음 자체가 아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 본질"이라 했다. 로이의 마지막 장면에 의하면, 레플리컨트들은 인간과 달리 스위치가 꺼지듯 고요하게, 마치 기능정지와도 같은 죽음을 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음을 피하려 했다. 고통의 여부와는 별개로, 죽음에 대한 인식(두려움) 자체는 인간과 같기 때문이겠지. 블레이드 러너와 상부 관련자들은 레플리컨트를 처리하는 일에 대해 '폐기(retirement)'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레플리컨트들은 자신들의 마지막을 명백히 "죽음"으로 인식한다. 인간과 똑같이 말이다.


영화 속 인간과 레플리컨트 사이의 갈등은 곧 현실의 계급 갈등과 같다. 인간을 사유화, 도구화하려는 시도와 그에 반(反)하여 죽음으로서라도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는, 어떤 문화권을 막론하고서라도 지배-피지배 계급이 성립한 역사 이래 끊이지 않는 일이다. 지배 체제에 반하는 피지배자들의 권리 주장이, 언제나 부적응으로 폄훼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로이와의 만남 이후 레이첼을 데리고 도망친 릭 데커드. 이는 곧 로이의 유언에 담긴 "인간성"이 릭을 단 한 명의 "이해자"로 만든 것이다. 로이 일행의 자살 결사와도 같은 지구 침입은 어쩌면 그 한 가지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릭과 로이의 단 한 번의 만남은, 계급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을 남긴다. 때문에 릭을 레플리컨트라고 여기면 릭 또한 그저 또 하나의 탈주자가 됐을 뿐, 영화의 모든 과정과 로이의 유언이 무의미해지는 셈이다. 그게 결론이라면 너무 쓸 데 없이 슬프다.



영화는 주제의식 이전에, 시청각적으로 관객을 홀린다. 80년대 특유의 근본없이 조야한 분위기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지적인 분위기가 빚어내는 독특한 엇박자의 맛이 영화에 있다. 시드 미드가 디자인한 디스토피아 LA는 아름다우면서도 불쾌한, 보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시각적 혼돈을 제시한다. 여기에 예나 지금이나 투박한, 하지만 미래를 배경으로 한 느와르에는 제법 어울리는 듯한 해리슨 포드의 연기가 있으며, 그에 질 세라 만만찮게 뻣뻣한, 그러나 헤라로 빚은 듯 완벽한 숀 영의 얼굴이 가세한다. 그 모든 시각적 언밸런스들을 반젤리스의 음악이 정리한다. 축축한 LA의 낙오자들을 위로하는 듯 따뜻한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조소(嘲笑)하듯 차갑고 날카롭기도 한 그 음악. 가장 재미있는 영화라고는 못 하겠으나, 가장 눈과 귀가 황홀한 영화이기는 하다. 그래서 나는 늘 인생 영화 베스트 3안에 이것을 꼽는다. 나머지 둘은 언제나 바뀔지언정 이 영화는 반드시 포함된다.





연출 리들리 스콧
각본 햄톤 팬커, 데이비드 피플즈
디자인 시드 미드
원작 필립 K. 딕 (안드로이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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