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르는 소속 팀인 어벤저스 내에서 토르는 이방인이다.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의 가운데에서도 늘 덩달아 토르를 괴롭힌 건 어쩌면 적적한 타향살이. 문제는 MCU 시리즈를 지켜보는 관객들에게도 이방인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점이다. MCU 입문자들에게 "토르 1, 2편은 걸러도 된다"는 가이드 글이 심심찮게 보일 정도니.
토르 1편은 냉정히 말 해 [어벤저스]에서 토르 이야기를 구구절절 하지 않기 위해 미리 해치워두는 "숙제" 같은 영화였고, 2편은 장차 타노스가 사용하게 될 인피니티 스톤 중 하나를 소개했을 뿐이다. 세번째인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오딘슨 가족의 갈등은 대부분 대사로 설명하는 선에서 그치고 부제인 "라그나로크"는 영화의 핵심 내용이라기 보다는 이야기를 마무리짓기 위해 마련해놓은 수단에 가깝다. 이 시리즈는 지구의 이야기이거나 어벤저스의 이야기가 아니면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
그러나 늘 가볍게, 빠르게 훅훅 넘기기만 했던 시리즈에 감각적인 연출과 캐릭터를 운용하는 노하우가 붙어주니까 그것들이 오히려 영화의 매력이 된다. 1편에서부터 "셰익스피어 식 슈퍼히어로 이야기"를 요구했던 관객이라면 더욱 실망할 노릇이지만, 영화는 마블이 제법 재미를 본 스페이스 코미디로 넘어간다.
[닥터 스트레인지] 때 부터였을까. 오소독스한 구성의 마블식 영웅 서사에 슬슬 질리던 참이라, 이렇게 파천황적으로 "깨는" 영화에서 개운함을 느낀다. 장르를 틀고 구성을 깨뜨려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크다. 진작에 코미디 캐릭터로서의 가능성을 내비쳤던 토르를 작정하고 코미디 무대에 올렸다는 점. 그 전 까지의 토르가 덜떨어진 이방인, 터프한 바이킹 전사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아 개성이 흐릿했다면, 이번엔 그 두 가지가 신기할 정도로 한 몸에 모두 녹는다. 양아치 장발과 쇠망치를 잃은 토르가 레이저총을 쏴댄다. 시대극 영웅이라는 틀에 더 이상 갇히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느긋한 70년대 음악으로 톤을 잡았다면 이쪽은 (최근 헐리웃에서 많이 주목하는) 80년대의 전자음악 톤. 덕분에 영화는 [플래시 고든]이나 [마스타 돌프] 등 80년대 B급 우주 영웅 장르로의 원점회귀처럼 보이기도 한다. 벼락장군 접신한 토르가 레드 제플린에 맞춰 작두 타듯 번개를 뱉어대는데, 환골탈태라는 말의 실사화가 거기에 있었다.
그런가하면 [닥터 스트레인지] 때의 매즈 미켈슨에게 그랬듯이, 케이트 블란쳇이 이런 B급 악당이나 연기할 배우인가, 하면서 한탄하는 이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케이트 블란쳇이 80년대 횡스크롤 아케이드 게임의 끝판왕처럼 연기하는 구경을 이런 영화가 아니면 언제 또 하겠는가. 얄팍한 B급 악당을 노련한 대배우가 연기하면 또 그것대로의 맛이라는 게 있는 법.
그 전 토르 영화들에게 가해졌던 비판처럼, 다음 전개를 위해 적당히 한 회 때우고 넘어가는 연속극 에피소드처럼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블의 오랜 노하우는 그 미묘한 여백을 기어이 메꾼다. 덕분에 애매한 빅가이였던 토르의 개성이 확실해지고, 어벤저스 중 딱히 접점이 없었던 토르와 브루스 배너 사이에 무시 못할 케미가 생겼다. 마블은 늘 저물어가는 것 같으면서도 한 방을 때린다.
연출 타이카 와이티티
각본 에릭 피어슨, 크레이그 카일, 크리스토퍼 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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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크는 언젠가부터 전투력 측정기가 된 것 같다. 아마도 [에이지 오브 울트론] 때 부터라고 봐야겠지. 최강이라는 이름값에 비해 떨어지는 인기 때문인지, 새로운 파워를 선보이기 위해 줘패기 좋은 튼튼한 샌드백? 쯤으로 전락하는 흐름인데. 이러다 나중에 스파이더맨한테도 굴욕 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 "시빌 워 당시의" 페퍼 포츠 처럼 이 시리즈의 제인 포스터도 "헤어졌다" 대사 한 줄로 깔끔히 퇴장이다. 생각해보면 아쉬울 게 없다. 이제 마블 스튜디오의 네임밸류만으로 충분히 장사가 되니 유명한 배우 이름 올려서 호객행위 할 이유도 없고, 앞으로의 시리즈에 사실 존재 가치도 없는 그저 "히어로 여자친구" 쯤의 캐릭터에 나탈리 포트만 섭외 비용을 감당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안 그래도 시오니즘 논란도 있고 마블이랑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라며.
- 그런가하면 반대로 워리어즈 쓰리를 그렇게 쓰라리게 퇴장시킬 필요가 있었나 싶다. 영화 자체도 딱히 어둡고 무거운 톤이 아닌데 그렇게 끔찍하면서도 허무하게 전작의 동료들을 날려버려야 했나. 앞으로의 전개에 필요가 없다면 다른 행성 어딘가를 개척하러 떠난다, 쯤으로 정리해도 될텐데. 그런가하면 레이디 시프는 등장은 커녕 아예 언급조차 안 되고. 제인 퇴장시키니까 삼각관계 나머지 축도 필요없다 이건지, 아니면 나중을 위해서 보류한 건지.
아니 애초에 아사노 타다노부 같은 괴짜 인디 배우가 이 시리즈에 나온 것 부터가 희한한 일이었고.
- 폴리네시아계 배우들이 군데 군데 눈에 띈다 싶더니만, 감독에 대해 검색해보니 마오리족 아이덴티티가 꽤 강한 사람인 것 같다. 그의 필모에 관심이 생겼다.
- 좋아하는 헐리웃 배우 다섯 손가락 안에 샘 닐 꼽는데, 눈앞에 나오는데도 몰랐다. 세상에..
덧글
그나저나 저 아스가르드 난민사태는 어떻게 처리할지가 궁금합니다. 사실 코믹스에선 비슷한 사태로 한 몇년간 아스가르드인들이 지구에 들끓었죠. ^^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레드제플린 노래를 배경으로 보여지는 토르의 액션씬 만큼은 역대 MCU 중에서 토르의 멋진 모습이 가장 잘 나온거 같아요.
토르와 배너는 진짜 접점이 없었죠. 관심분야도 다르고 하다보니...
다만 '변신하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라는 배너의 트라우마를 너무 가볍게 넘겨버린게 아닌가 하는 불만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