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치맨 Watchmen (2009) by 멧가비


투명하고 공정한 교과서적 영웅도, 절대적으로 사악한 악당도 존재하지 않는 이 기묘한 슈퍼히어로 추리극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립각은 닥터 맨해튼과 오지만디아스 사이에 있다.


닥터 맨해튼은 유일한 초능력자이자 신에 비견되는 존재로서, "인간을 구원할 힘"이라는 긍정적 존재로 여겨졌지만 그 끝은 냉전시대가 가장 두려워했던 파괴력 그 자체라는 오명. 코미디언은 일찌기 닥터 맨해튼의 방관자적 태도를 지적한 바 있다. 닥터 맨해튼은 인간으로서 사망하고 초인으로 부활한 시점에서 실질적으로는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는 초월자의 관점에서 모래 한 톨 만큼이나 사소한 일들에 손대지 않는 초 거시적 방관이다. 너무나 크고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슈퍼 영웅으로서는 치명적인 무능함이다. 그 슈퍼맨도 나무에 오른 고양이를 구하지 않던가.


영화판의 각색에 의하면 외계 오징어 대신 닥터 맨해튼 본인이 인류의 적으로 지목되고, 오지만디아스 음모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지 않은 채 겸허히 지구를 떠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서 인류에 공헌한다는 각색은 현대 종교의 허풍선 "신"들이 하는 역할과도 일맥상통, 오히려 현실적인 은유로서 기능한다. 게다가 닥터 맨해튼의 이름이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온 것을 생각하면 그 연결성만큼은 원작을 초월한다.


반면, 인간 능력의 극한이라고 평가 받는 오지만디아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그의 계획은 수 많은 사상자를 낳은 명백한 "학살"이나, 이것의 바탕에 악이 존재했노라고 단순한 이분법으로 섣불리 평가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한계 내에서 가장 산술적으로 좋은 방법을 찾아냈고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공허한 힘 닥터 맨해튼이 방관했던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계획을 성공적으로 끝마쳤음에 전율하는 오지만디아스에게 닥터 맨해튼은, "끝나는 것은 없다"는 회심의 한 마디를 남긴다. 시간의 모든 범위를 한 순간으로(혹은 더 초월적으로) 인지하는 닥터 맨해튼의 관점으로는 오지만디아스의 그 "피로 물든 평화"가 유지되는 시간이 "장대한 영원"중 보잘 것 없는 점 하나에도 미치지 못 할테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오지만디아스의 계획과 그 결과물이 의미없다 할 일도 아니다. 아무리 대단한 통찰을 가졌다 한들 직접 느끼는 것은 당장의 한 순간 뿐인, 현재를 살아가는 한 인간이 "영원함"을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관점이라면 인간의 모든 노력이 부질 없을테니 말이다. 반대로 닥터 맨해튼의 방관은, 손 대서 달라지지 않을 일을 손 대지 않았을 뿐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이렇게 닥터 맨해튼과 오지만디아스는 서로를 비판할 수 있는 척도이자, 또한 반대로 서로를 변명해 줄 수 있는 "상대적 관점"으로서 대구를 이룬다. 신은 인간들을 무력하다 비웃을 수 없으며, 인간은 자신들이 멋대로 세운 신을 무심하다 비난할 수 없다.


세상의 운명을 정하는 두 큰 힘으로서 대립각이 닥터 맨해튼과 오지만디아스였다면, 그 아래에서 세상을 직접 살아가는 시민으로서의 관점은 나이트아울과 로어섀크가 대립각을 형성한다. 틀린 줄 알면서도 적당히 눈 감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옳다고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 평범한 사람들이 살면서 겪을 딜레마 중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것들을 대변한다.


상기한 인물 구도는 원작에 담긴 수 많은 상징성과 풍자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는 제한된 상영 시간이라는 매체 특성에 맞게 필요한 것과 버릴 것을 취사 선택한다. 이를 두고 원작 모독이라고 하는 것은 매체에 대한 몰이해다. 만드는 이의 선택은 존중하되 선택에 의한 결과물에 대해서만 좋고 나쁨을 논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관람 태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검은 수송선" 이야기는 원작 단계에서 이미 사족이자 중언부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생략한 극장 개봉판을 좋아한다.


영화 판에는 원작 그대로 채 구현하지 못한 서브 텍스트들 이상의 상징과 풍자가 오프닝 시퀀스에 담겨있다. 그리고 영화에는 만화가 갖지 못한 편집의 리듬감과 시청각적 미장센이 존재한다. 그냥 "잘 된 실사화"가 아닌, 텍스트에 대한 그럴싸한 재구성이다. 이 이상으로 원작을 존중하기는 힘들 것이다.


비주얼리스트로서의 재능과 고용감독으로서의 한계를 동시에 지닌 잭 스나이더가 고스란히 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잭 스나이더는 애초에 작가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좋은 각본이 주어지면 그에 걸맞는 좋은 그림으로 좋은 영화를 완성시키는 게 특기인 사람이다. 그의 필모그래피 중 굵직한 작품들에서 대개 단순 연출가로만 참여했다. 캐릭터 묘사나 스토리의 헛점 등은 각본가나 그 이전 기획 단계에서 받아야 할 비판이지, 글-그림 중에 그림을 맡은 사람에게 아무리 원성해봤자 섀도 복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 뽑으라고 고용한 사람이 그림을 잘 뽑으니 스튜디오에서 계속 고용하는 게 아니겠는가.






연출 잭 스나이더
각본 Alex Tse, 데이빗 헤이터
원작 앨런 무어 (동명 코믹스, DC 코믹스,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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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포스21 2017/11/30 18:08 #

    흠, 꽤 흥미롭게 본 영화였죠.
  • 잠본이 2017/12/01 02:02 #

    요즘 행보를 보면 역시 스나이더는 건축가긴 한데 설계자는 아니라 설계자를 잘만나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ㅠㅠ)
  • 멧가비 2017/12/01 08:53 #

    그지같은 설계도 들고 와서 자꾸 대궐 지어달라는 놈들 정말 나쁜 놈들 아닙니까
  • 잠본이 2017/12/02 00:05 #

    게다가 발주자는 준공식 스케줄 맞춰야 하니 빨리빨리 지으라고 닥달이나 하고 영 글러먹었죠...
  • 풍신 2017/12/01 08:33 #

    잭은 영화 계의 오오바리 마사미 같은 존재일지도요.
  • 멧가비 2017/12/01 15:17 #

    적절하네요ㅋㅋㅋ테라다 카츠야 얹습니다
  • akd637 2017/12/01 13:50 #

    https://www.youtube.com/watch?v=qOpHKXj-tZM
    https://vimeo.com/189876347

    [배트맨 대 슈퍼맨]을 처음 보고 지루함에 충격을 먹어서 나가 떨어졌었지만 몇번은 본 지금은, 솔직히 좋은 점이 꽤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쁜 점의 합이 더 커서 그렇죠.). 아니, 잭 스나이더는 '연출가'나 비주얼리스트로는 그냥 천재적인 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트맨 대 슈퍼맨] 오프닝에서 웨인 부부의 죽음 장면은 사실상 시민 케인의 장면을 오마주한 것이나 다름없죠.

    잭 스나이더는 [맨오브스틸]이나 [왓치맨] 등 말고는 각본을 고르는 안목이 없는건지 각본이 뽑히는 운이 없는 건지 영 그렇네요. 듣는 바에 의하면 워너와 사이가 안 좋아진지라 DC필름스에 돌아올 가망도 없는 듯 한데. 개인적으로 잭 스나이더가 배트맨 솔로를 연출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데 (왜냐하면 [배V슈]에서 잭 스나이더가 터치한 배트맨의 광기와 묘사는 끝내주었기에. [저스티스 리그]에 이런 모습이 전혀 없어서 뒷목 잡았죠.) 허황된 소망이네요. 하여튼 오지만디아스와 맨해튼의 비교 잘 읽었어요. 역시나 글재주가 뛰어나시군요.
  • 멧가비 2017/12/01 22:17 #

    워너DC가 환장하겠는 게 그 부분 같습니다. 아예 개운하게 망치진 않는다는 거죠.
    좋은 부분이 묘하게 조금씩은 있어서, 실망하면서도 다음에 또 속아주게 만들어요. 배대슈 같은 경우도 바로 그 배트맨 시퀀스에 낚인 사람 많이 봤습니다.
    일 잘 한다고 칭찬만 받는 만년 계장 같은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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