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에 와선 너무나 유명하다 못해 농담거리가 된 클리셰, 문어 모양의 화성인을 처음으로 구상한 동명 소설이 원작. 이야기 역시 외계인이 침공한다, 외계인이 쓰러진다 정도로 가볍게 축약할 수 있는 전통적 플롯이다. 정확히는, 원작이 그러한 플롯의 선구자인 셈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억울하다면 억울하다 하겠다. 단촐한 플롯의 나머지 여백은, 스펙터클한 볼거리와 세련된 호러 연출, 시대상을 반영한 가족 드라마 등이 채운다.
영화의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은 결말이다. 내내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감과 공포가 일순 허물어지는 듯한, 미생물의 공격이라는 어쩌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이기도 한 결과.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라서 좋다. 지구를 지켜내는 게 반드시 인간일 필요는 없질 않은가. 외계인들이 공격한 건 인간인데, 인간을 구원하는 건 미생물이라니. 지구의 지배자로서 만물 위에 군림한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통렬한 일침이다.
레트로 외계인이 침공하는 초현실 재난을 헤쳐나가는 주인공은 팍스 아메리카나 마초 영웅 따위가 아닌, 가족의 해체를 겪은 블루칼라 노동자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라 이타적인 온정을 베풀 여유가 없다. '9.11 테러' 당시 보통 사람들이 체험했을 절망과 무력감을 은유한다. 다른 얘기지만, 나는 이 때 톰 크루즈가 초라한 신세에 자조하는 생활 연기도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팀 로빈스의 중간 투입은 영화의 묵시록적 초현실성을 잠시 환기하고, 아포칼립스 아래 가까운 곳에서 벌어질 수 있는 현실의 공포를 재현, 마치 "죽음의 눈치 게임" 따위처럼 장르를 서늘한 심리 스릴러로 전환한다. 문득 [쇼생크 탈출]이 떠오르며, 앤디 두프레인이 정말 아내를 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된다.
VR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가 자연스럽게 극장에 걸릴 시대가 오면, 가장 먼저 리메이크 해야할 텍스트 중 하나다.
연출 스티븐 스필버그
각본 데이빗 코엡, 조시 프리드먼
원작 허버트 조지 웰스 (The War Of The Worlds, 1898)
덧글
빅토리아시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화성인의 '트라이포드'와 '썬더차일드호'와의 대결을 영상으로 보고싶은데 말입니다.
시대와 장소를 바꾸면서도 배경설정, 인물설정의 디테일을 잘 잡은게
역시 스필버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트랙백은 뭘 어떻게 하는 건지 제가 잘 몰라서 피드백을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