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라이더 파이즈 仮面ライダー555(2003) by 멧가비


헤이세이 가면라이더 시리즈의 테마 중 하나는 '괴인(오르페녹)이 인간으로부터 태어나는 모순'을 강조하는 점. 즉, 괴인에 대항하는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어둠이나 모순, 표리부동 등에 대해 더 날카롭게 묘사하는 식인데, 본작은 그런 경향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경향이 강하다. 


악당이 인간의 어둠을 거름삼아 괴인을 탄생시킨다, 는 클리셰를 뛰어넘어, 타인으로부터 비참하게 공격받은 "피해자"가 괴인이 돼버리는 아이러니컬한 설정을 채용함으로써 드라마에 비극을 깊게 부여한다. [울트라맨]의 '서성괴수 쟈미라'가 연상된다. 그와 동시에 '힘 자체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초능력 영웅 서사의 고전적 테마를 비틀어, '괴인이 인간의 자아를 유지한다면?'이라는 난해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본작의 묘사에 의하면 인간이 이미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약간의 불씨만 당겨지면 너무도 간단히 괴인이 되어버린다는 것. 즉 여기서의 괴인이란 악의 제국이 만든 개조 생명체 따위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 가진 부정적인 단면의 형상화에 불과하다. 그런가하면 두 주인공인 이누이 타쿠미와 키바 유지의 일행이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괴인과 인간, 괴인과 가면라이더라는(대비되었어야 할) 개념 사이에 경계가 사라진다. 중반 이후는 본격적으로 인간의 어둠에 대한 탐구가 진행되는데, 쇼와 시리즈에서는 늘 악의 제국이 행했던 인체실험을 여기서는 평범한 인간이, 그것도 경찰이 집행하는 등의 충격적인 전개가 벌어지기도 한다. [가면라이더 쿠우가] 때의 경찰에 대한 묘사와는 천양지차.


베이스에 깔린 기초 설정들이 파격적인 덕분에 전개 역시 파행의 연속이다. 심지어 어느 지점에 가면 라이더와 인간과 괴인이라는 건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와 이름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아예 동일한 존재라는 해석에 도달한다. 가면라이더라는 가면 밑의 인간의 얼굴, 그리고 더 아래에 있는 이누이 타쿠미의 비밀이 밝혀지는 부분 까지 가면 피아구분은 커녕 혼란스럽다 못해 멀미가 날 지경이 된다. 본작에서의 가면라이더, 인간, 괴인의 구분은 그저 인종 묘사에 대한 은유로 기능한다. 마블 코믹스 [엑스맨]의 영향이 있을텐데, 시기적으로도 브라이언 싱어의 첫 영화판이 세상에 나온 이후.


주인공 이누이 타쿠미는 가면라이더 주인공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가면라이더가 되기를 한사코 거부했던 인물이다. 그와 더불어 벨트를 잃어버리거나 탈취 당하는 이벤트도 자주 발생하곤 하는데, 이것이 본격적으로 벨트(델타) 쟁탈전까지 확장되면 드라마는 마치 [반지의 제왕]의 특촬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과 괴인 간 흐릿한 경계라는 테마 역시 스미골-골룸 캐릭터를 참고한 흔적이 있고, 당시 일본에서는 [반지의 제왕] 개봉 이후 한창 붐이기도 했으니 영향을 받았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겠다.


쿠사카 마사토는 작품의 테마 일부를 상징하는 캐릭터. 그가 괴인(오르페녹)을 대하는 모습은 현실의 호모포비아 혹은 인종주의자를 은유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상징성 뿐만이 아니라, 위악적이지만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진 않고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듯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끝내 실패하는 처절한 인물. 보고 있으면 빡치는데 안 나오면 심심하다.


흔히 가면라이더 시리즈의 주요 배경이 되는 "아지트"는 대개는 카페나 식당 등의 캐주얼한 업소다. 그런데 본작에서는 독특하게도 세탁소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후반부에는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가진 괴인도 있다, 정도가 아니라 결국 오르페녹도 인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세탁소라는 공간적 배경은 구겨진 옷처럼 오르페녹도 그저 흠집난 인간일 뿐이라는 상징성을 드러내는 공간과도 같다. 라이더도, 오르페녹도 아닌 가장 평범한 누군가였던 케타로가 세탁소 주인이라는 점 역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누이 그룹과 키바 그룹이 묘하게 얼키고 설키면서 인연을 만들어 가는 파트는 캠퍼스 청춘 코미디같은 풋풋한 느낌이 배어있다. 그러나 초반부터 노골적으로 깔리는 비극성, 조금만 눈치가 빠르면 이 드라마의 결말이 결코 해피엔딩은 아닐 거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여섯 청춘의 좋은 시간은 그래서 너무 슬프고 짧다.


등장 인물 대부분이 가면라이더 시리즈 전통의 방랑자 캐릭터. 라이더와 인간, 괴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들의 우울한 정서는, 마치 대학 수험에 실패한 후 나아갈 바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현실의 청춘들의 모습을 보는 듯해 공상드라마로서는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씁쓸함이 느껴진다.



구세대 휴대폰, 디지털 카메라 등 당대의 인기 모바일전자제품 등을 변형한 변신 도구 등의 아이템이 눈에 띈다. 특촬 드라마 중에서도 유독 시대상이 많이 드러난 작품 중 하나다.



덧글

  • 잠본이 2018/01/03 00:31 #

    오르페녹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딱 뱀파이어의 현대적 변주죠. 신인류와 구인류의 대치라는 점에선 아기토의 신인류=라이더를 신인류=괴인으로 치환한듯한 느낌인데 돌연변이라는 설정은 엑스맨 생각나기 딱 좋긴 하지만 같은 이시노모리 계열 중에선 이나즈만이라는 훌륭한 선례도 있었고.

    이름에 犬자가 들어가는 양반이 알고보니 늑대인간이었다는 것도 그렇고, 고전호러 오마주라는 면에선 대놓고 괴물군 패러디하는 가면라이더 키바보다 더 충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사람의 대표격인 케이타로와 오르페녹인 유카의 풋사랑이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도 그렇고 주요인물들이 대부분 안좋은 결말을 맞는다는 점에선 비극의 색채가 꽤 짙은 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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