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팬서 Black Panther (2018) by 멧가비


[시빌 워]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블랙 팬서라는 또 하나의 멋진 피지컬 파이터가 존재함을 선포했다. 따라서 그에 걸맞는 육체파 무투파 영화가 나오길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예고편에서 이미 직감한다. 내 맘 같은 영화는 아닐 것임을.


첩보 액션 맛뵈기에 로얄 패밀리 멜로 드라마 간보기 등등, 영화는 기대보다 조금 더 화려하고 조금 더 조잡하다. 뷔페 처음 가 본 사람처럼 영화 한 편에 가능한한 모든 것을 조금씩은 다 담아보자는 빠이팅이 부담스럽다. 마블 당신들 이제 그렇게 까지 안 해도 되잖아. 무광 블랙의 폼나는 도시 영웅담보다는 "아프리칸 판타지"에 더 촛점을 맞춰진 플롯. 물리적으로 꽝꽝 부딪혀대는, 테스토스테론 넘치는 이야기를 즐기고 싶었는데 영화는 영적인 세계로의 어색한 발걸음을 한다.


앞서 어떤 작품들이 비슷했노라고 굳이 예를 들 필요 조차 없을 정도로 익숙한 플롯. 그 예상 가능한 서사는 축약의 미덕 없이 너무나 길기만 하고, 볼거리라며 에스닉한 미장센들을 제법 늘어놓고는 있으나 그 안에 진짜가 얼마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몰입을 방해한다. 포춘 쿠키처럼,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고는 있으나 사실은 철저히 현지인들의 입맛에 맞춘 가짜들 말이다. 아프리카 부족이 힌두교 신을 모신다고 떠드는 영화라니. 적어도 '하누만'은 베다 세계관에 아주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모를 수가 없는 캐릭터인데, 그걸 갖다 넣냐.


차라리 존 카펜터의 [빅 트러블]처럼 진지함이라고는 코 풀어 버리는 휴지 뭉치마냥 하찮게 여기는 영화였더라면 수긍할 수 있겠다. 하지만 카펜터가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을 골 때리는 어트랙션 쯤으로 재해석한 것과 동일선상에 놓기엔 톤이 다르다. 타이틀롤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악역 킬몽거는 명백히 '흑표당'의 이미지를 빌려온 인물. 아프리칸 어메리칸으로서 경험한 사회적 차별들을 극복하자며 흑인들의 급진 혁명을 외치는 캐릭터를 풀어놓은 무대가 서구 백인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단지 색만 검을 뿐인 "중간계(Middle-Earth)"라면 대체 이 영화의 태도와 정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 시각적으로는 중간계보다는 나부 왕국에 가깝지만)


물론 첫 술에 배부르길 바랄 수는 없지. 그게 포춘 쿠키든 나폴리탄 스파게티든, 타자의 문화에 얼마나 조미료를 뿌렸든 간에 백인들이 낯설어 할 다른 민족의 문화로 화면을 채워 전면에 내세운 메이저 영화가,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시리즈에서 나왔다는 점은 확실히 높게 평가할 일이다. 전통이라는 그림자에 머무를 것이냐 아니면 국제 무대에 발 맞춰 진보할 것이냐의 선택 문제는 아프리카계 사람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아프리카 국가들에서의 흥행 결과는 나중에 꼭 찾아봐야겠다.


어쨌거나 영화가 이래 저래 잿밥에 관심 두는 동안 원톱으로 내달렸어야 할 주인공 블랙 팬서는 소외되는 인상이 짙다. 트찰라와 아버지의 이야기조차 사실은 킬몽거라는 캐릭터를 극적으로 소개하기 위한 포석에 지나지 않더라. 어부지리의 장본인인 킬몽거는 말 할 것도 없고 충신 오코예와 동생 슈리 등도 인상깊은 캐릭터다. 주인공만 쏙 빼놓고 모두가 사이좋게 나눠먹는다. 


다시 말하지만 킬몽거는 좋다. 애매한 세계정복이 아닌, 자신의 성장 환경과 민족성과 관련한 뚜렷한 정서와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실현시키는 스마트한 사상가. 악역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 곳에 다다르기 직전 까지가 훌륭하다. [시빌 워]의 지모와 더불어, 주인공에게 필요한 덕목을 갖춘 악역 캐릭터라서, 좋지만 아이러니하다. 이미 선행 등장했던 블랙 팬서 대신 킬몽거가 실질적인 주인공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영화를 MCU 서사의 한 파트가 아닌, 독립된 한 편의 영화로서 분리시키는 데에 성공하는 점도 고무적이다.


장단점 또렷이 나뉘는데 단점쪽이 더 신경 쓰이는 마블 스튜디오 영화는 오랜만이다. 오랜만인데 안 반갑다.






연출 라이언 쿠글러
각본 라이언 쿠글러, 조 로버트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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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누만 이름이 나오는데 순간 이게 떠올라서 흠칫했다


덧글

  • 포스21 2018/02/23 00:23 #

    대체로 공감이 가네요. 전 굳이 따지면 호감 쪽이긴 하지만 , 확실히 오코예나 슈리 , 그리고 전여친도 꽤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작중의 와칸다는 사실상 미국 흑인들의 판타지 같은 것이라고 하네요. 뭐 흑인도 , 미국인도 아닌 입장에선 좀 이해하기 힘들긴 합니다만...
  • 멧가비 2018/02/23 02:31 #

    백인들이 늘 만들던 뻔한 판타지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미국 흑인들의 발상이라니 놀랍네요. 혹시 관련 자료가 있다면 알 수 있을까요.
  • Dannykim 2018/02/23 01:12 #

    저는 참 묘하게 이질감 들었던 지점이 와칸다의 과학력 묘사였는데요 역사적으로 과학의 발전이 어떤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제껴놓고 지구를 무대로 한 마블 영화들이 그간 보여줬던 말도안되는 SF판타지이면서도 어느 한 구석에서는 왠지 그럴싸한 현실적인 느낌, 그러니까 환상과 현실의 중간에 있는 어떤 지점에서 밸런스를 잡고 있었는데 이번 블랙팬서에서는 그 밸런스가 완전히 사라진 기분이 들었어요. 본문에 있던 말마따나 전부 가짜처럼 다가오더군요. 전차 포탄에 맞고도 생채기나 좀 나고 말았던 아이언맨이나 70년을 얼음속에 갇혀있다 살아돌아온 슈퍼솔져가 아무리 허무맹랑해도 왠지 내가 위험에 처하면 현실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구해줄것만 같던 그런 기분좋은 환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는 그런 느낌이요.
  • 멧가비 2018/02/23 02:34 #

    안 썼지만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갑자기 저래버리면 그 동안 화려하게 묘사됐던 아스가르드는 뭐가 되나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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