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탐구 - 슈퍼히어로 랜딩 20주년 고찰 by 멧가비


슈퍼히어로 영화 팬에게 2018년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10주년임과 동시에, 마블 코믹스 원작 실사 영화 전성기의 시작이기도 한 영화 [블레이드] 20주년이기도 하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걸출한 후속작에 가려 저평가 받지만 결코 장르 팬들에겐 무시할 수 없는 영화. 그 나름대로의 장르적 충실함과 후대에 끼친 영향들을 이쯤에서 되새긴다.


우선 영화가 세련된 점은 앞서 쓴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1편임에도 마치 프랜차이즈의 2편처럼,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까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새로 추가된 설정을 설명하는 데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델 토로의 2편.  이쪽은 뱀파이어 헌터가 뱀파이어 잡는 영화인데 캐릭터의 기원이니 뭐니 의미있냐, 는 태도로 강렬한 테크노 음악과 함께 시작부터 내달린다. 그 지나친 쿨함 때문에 어쩌면 영화의 각본에 담긴 비극성이 가려진 면이 적잖이 있지만, 반대로 그 쿨한 태도는 하나의 서브 장르를 만든다.





때는 세기말. 영화 관련 매체 등은 '하이브리드 액션'이라는 정체불명의 개념을 말 하기 시작한다. 영미권에서의 'hybrid genre'와는 가리키는 대상이 다르며, 하이브리드 액션이라고 카테고라이즈 된 영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렇다. 테크노 혹은 메탈 등 비트 강한 음악이 삽입되며 가죽 재킷 혹은 롱 코트(여성 캐릭터의 경우는 가죽 타이츠라든지)를 입은 인물들이 쿵푸를 구사하고 때로는 총, 칼을 휘두르며 "폼 나게" 싸우는 영화들이 대충 그 범주에 들어간다. [매트릭스]가 그 이듬해에 등장한다. 정확하게 들어맞진 않지만 또 그 다음 해에 나온 [엑스맨]도 당시 같이 언급되곤 했으며, 뒤를 이어 [이퀼리브리엄], [언더 월드] 등이 줄지어 나타난다. 같은 카테고리로 묶이지만 각각 가상현실 SF, 전체주의 디스토피아 SF, 어반 판타지로 '장르'는 제각각이다. 잘 되진 않은 것 같지만 [이온 플럭스] 실사판이나 [울트라 바이올렛] 등도  뒤를 이었다. '하이브리드 액션'이란 건 장르라기 보다는 영화 속 시청각적 요소의 트렌드를 특정하던 말에 가까웠을 것이다. 해당 단어를 우리와 같은 의미로 영미권에서 사용하진 않았던 것 같지만 어쨌든 그러한 경향이 존재했던 것은 당대에 개봉했던 영화들로 증명되는 셈이다. 그러나 동시기에 같이, 그러나 훨씬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슈퍼히어로 장르'에 파이를 빼앗긴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싹수가 젬병이었던 건지, 아무튼 하이브리드 액션은 "세기말적 분위기의 소강"이라는 썰물에 휩쓸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게 된다.


슈퍼히어로 장르 자체에 대한 파급력도 빼 놓아선 안 된다. 2002년 [스파이더맨]은 파격적이게도 B 호러 전문 연출자로 인식되던 샘 레이미가 연출하게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도 영화에 호러틱한 연출이 군데 군데 스며있다. 2편에서 닥터 옥토푸스의 수술 씬은 샘 레이미 꽃의 "만개"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블레이드]는 슈퍼히어로 실사 영화라는 장르가 아직은 주류이긴 커녕 그 단어 조차도 생소하던 시기였기 때문인지 액션이 가미된 뱀파이어 퓨전 호러 장르로 더 많이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다. 스파이더맨의 연출자로 샘 레이미가 낙점된 데에는 이 영화의 영향이 있었던 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10주년을 맞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몇 해 전부터 눈에 띌 정도로 PCness를 작품들 속에 도입해 논쟁을 부르곤 하는데, 이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90년대에 흑인 슈퍼 영웅이 금발 백인 악당을 혼내주는 영화가, 정말 "갑자기" 튀어나온 케이스다. 요즘 기준으로는 대수롭지 않을지 모르지만 흑인 배우를 원톱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메이저 오락 영화는 2010년대 현재에도 흔치 않다. 하물며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이거나 아프리카 노예가 백인 지주에 대항하는 등의 스토리도 아닌, 그저 뱀파이어 만화 원작 영화일 뿐인데도! 


잠깐 옆 길로 새자면, 웨슬리 스나입스는 이미 1992년에 [패신저 57]에서 백인 악당을 혼내준 바 있다. 그런가하면 97년 출연작인 [원 나잇 스탠드]는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섹스를 다룬 최초의 영화로 알려지기도 했다. 실제로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매체 등에서는 그렇게 홍보되곤 했다. 인종색과 관계 없이 메이저 영화에서 주인공을 도맡는 배우로서 웨슬리 스나입스의 전성기가 윌 스미스보다도 조금 빨랐다. [블레이드]의 경우야 원작의 캐릭터부터가 흑인이긴 하지만, 헐리웃의 유서 깊은 악습(?)인 "화이트 워싱"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과, 굳이 흑인이 주인공인 만화를 실사화하지 않아도 됐을 선택지를 씹어 먹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겠다. 웨슬리 스나입스가 당시 제작자들에게 신뢰 받는 호객꾼이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멀리 가면 뱀파이어 호러의 사촌 뻘 쯤 되는 좀비 영화의 현대화에도 기여한 바가 있을 것이다. 조지 A. 로메로를 상징으로 하는 사회 풍자극으로서의 무거운 호러에서 벗어나 액션성과 속도감에 포커스를 맞추게 된 점. 그 시작이 이 영화에 있지 않겠냐는 말이다. 좀비 장르의 뿌리가 고딕 뱀파이어 영화들에 있다는 건 중론이기도 하고. 아닌 게 아니라 현대 좀비 영화에서 좀비라는 설정이 갖는 집객력 중 하나는, 인간 배우가 연기하는 존재들을 인간이 아닌, 파괴해야 할 무언가로 설정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신체 파괴를 죄책감과 거북함 없이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심리적 안전장치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이야말로 뱀파이어 영화들과의 공통 분모라고 생각하는데, [블레이드]의 도입부는 클럽에서 시뻘겋게 피를 뒤집어쓰고 무아지경에 빠진 뱀파이어들을 신나게 찢어대는 웨슬리 스나입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 맥락에서 나는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역시 이 영화의 자장 안에 있다고 단언한다. 위에서 언급한 '하이브리드 액션'에 슬쩍 포함되는 경향도 있고. 당장에 스피드! 액션! 좀비! 하면 [28일 후]와 [새벽의 저주]를 그 시초 쯤으로 언급하게 되는데, 이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닐 거라 이거지.



엉뚱하고도 놀랍게도 [존 윅]과 상당수 겹치는 점이 있다. 영화의 시작부터 주인공은 이미 그가 속한 뒷세계에서 악명에 가까운 평판이 자자한 거물. 존윅이 그에 대한 두려움이 담긴 별명 '바바예가'로 불리운다면 블레이드에겐 '데이 워커'라는 이명이 있다. 제거해야 할 상대라면 불문곡직 시원하게 뚫고 찢는 점 역시 동일. 뻣뻣한 감정 연기 그러나 액션은 "되도록" 직접 연기하기로 유명한 두 배우 웨슬리 스나입스와 키아누 리브스 역시 비슷한 길을 걷게 되는데, 스나입스는 이 영화 그리고 리브스는 [매트릭스]를 통해 "쿵푸를 구사하는 서양인" 이미지를 얻음으로써 본의 아니게 이후의 필모그래피들을 망치게 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스나입스의 경우는 바로 이 영화 [블레이드]로 내리막을 타게 되지만 리브스에게 [존 윅]은 오히려 화려한 컴백작이라는 점이 정반대다.



상기했다시피 후속작의 그늘에 가려진 비운의 작품이다. 마치 [배트맨 비긴즈]처럼 말이다. 실제로 각본은 허술하고 CG는 제작 시기를 고려하더라도 수준이 높다고는 못 한다. 본 글에서 이래 저래 빨아줬지만 사실 그렇게 좋아하는 영화도 아니다. 진짜로 2편이 훨씬 멋지고 존나 재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뜯어보면 후대 작품들에게 레퍼런스로 작용하는 요소들을 엄청나게 많이 갖추고 있으니, 마치 누군가가 만우절 농담처럼 제목만 만들어 낸,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영화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영화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는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에 가깝다 할 정도로 말초적 장르 쾌감과 스타일만을 뚝심 있게 밀어부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만큼 그 "스타일" 자체에 대해서는 별개로 공정하게 평가함이 옳을 것이다.


당시 이제 막 타임 워너의 자회사가 된 '뉴 라인 시네마'가 제작했다. 즉 DC 코믹스와 한 지붕 밑에서 만들어졌다는 소리다. 마블 코믹스 원작이면서 DC와 한솥밥 먹은 영화라니. 다시는 볼 수 없을 기묘한 산업적 구조 아래에서, 인간과 흡혈귀의 혼혈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탄생한 것도 참 묘하다면 묘하다.


아, 제목 얘기 해야지. [데드풀]의 데드풀이 일종의 밈으로 승화시켜버린 "슈퍼히어로 랜딩"을 실사 영화에서 최초로 선보인 캐릭터다. 정확히 말하면, 오랜 영화 역사 중 그런 비슷한 포즈로 어디선가 내려와 어디엔가 착지한 캐릭터가 최소 하나 쯤 언젠가 먼저 있지 않았겠냐 싶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인지도가 유효한 메이저 영화에서는 블레이드가 최초 맞다. 슈퍼히어로 랜딩이 [매트릭스]에서 처음 나왔단 소리가 어디선가 돌고 있다던데, 뭔 소리여 시방.





덧글

  • 더카니지 2018/07/03 14:26 #

    망작 3편만 아니었으면 시리즈가 좀더 장수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죠...2편에서 델토로가 잘해냈는데 왜 감독을 고이어로 바꾼걸까 의문.
  • 멧가비 2018/07/04 04:39 #

    혹시 델 토로가 시리즈를 계속 맡았더라면 헬보이 시리즈가 없었을지도 모르죠
  • 닛코 2018/07/03 16:09 #

    저는 블레이드 1편 상당히 좋아합니다. 처음 봤을 때의 그 세련된(듯한 느낌의) 영상과 시원한 액션을 잊을 수가 없어요...
  • 멧가비 2018/07/04 04:43 #

    늘어지거나 궁상맞거나 찌질한 느낌이라고는 단 한 순간도 없이, 폼 나고 세련되고 쿨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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