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 Rear Window (1954) by 멧가비


프랑소와 트뤼포는 이 영화에 대해 '영화에 대한 영화'라고 수식한 바 있다. 관음증에 대한 중립적 고발과 장르적인 범죄 수사극이라는 외피를 걷어내고 나면,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영화에 대한 영화 그 자체다.


이 영화가 가진 독특한 양식, 관객의 시선이 직접 영화 속 인물을 관찰하는 대신 영화 속 또 다른 프레임을 거치게 구성되어 있다. 관객은 건너 아파트 주민들의 일상은 물론이고 중심 소재인 살인사건 역시, 주인공 집의 창문이나 주인공의 쌍안경을 통해 관찰하게 되는데, 카메라 앞에 놓은 사물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공간"을 거쳐 인물들을 관조하게 되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히치콕의 공간 형성은 오즈 영화에서의 "관조"와 달리,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영화 보는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를 보고있는 듯 메타적인 느낌을 제공하며, 동시에 "관음증 환자를 관음"하는 듯한 유죄적 통쾌함을 느끼게 만든다.


주인공 제프리가 건너 아파트를 관찰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무료하기 때문"이지 그의 직업이 기자인 것과는 본질적으로 무관해 보인다. 이는 지면으로든 영상으로든, 어떠한 형태로든 "이야기"라는 것을 소비하는 독자-관객이 가지는 원초적인 행동 동기에 대한 은유로도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심심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소비한다.


최초의 활동 사진에는 어떠한 예술적 야심이나 사회적 메타포가 없었을 것이다. 즉, 극영화로서의 원초성으로서의 회귀. 그것이 제프리가 창문과 쌍안경을 붙들고 있는 이유에 다름 아니다. 일생을 바쳐 "재미있는 영화"라는 단순명쾌한 명제에 충실했던 히치콕으로서는, 어쩌면 관객에게 보내는 무언의 호소이거나 그 자신도 관객으로서 드러내는 동지의식의 신호였을지 모르겠다.


결국 영화라는 것도 영화 속 가공 인물들의 삶의 박제, 영화 감상이란 그들의 삶을 훔쳐보는 것이다. 모든 관객은 다리에 깁스하고 쌍안경에 집착하는 제프리다.






연출 알프레드 히치콕
각본 존 마이클 하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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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비아

이 영화의 기본적인 설정은 [울트라 세븐] 10화에서 노골적으로 오마주(?) 된다.





비정기 한 마디

"다시 보고싶다 오렌지캬라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