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줘 Gone Girl (2014) by 멧가비


영화의 가장 놀라운 지점은 충격적인 전개도, 반전도 아니다. 추리극도 사이코 스릴리도 치정극도 아닌, 아니 사실은 그것들을 모두 품은 "코즈믹 호러"가 실질적인 장르였다는 점에서 기겁한다. 내용이 아니라 장르 자체에 놀라다니.


잠깐 미시적으로 보자면, 영화는 적절한 징벌에 대해 하나의 대답을 제시하고선 관객들 사이에서 논쟁이 생산되는 것을 꾀하는 듯 보인다.


우선은 남자의 잘못이다. 불륜은 그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벌 받아 마땅한 죄지. 그러나 그에 따라 남자가 받게될 사적 응징의 정도가 너무 과하다면 과할 것이고 마땅하다면 마땅할 것이며 이는 전적으로 관객의 입장과 주관에 달려있다. 법이 심판하지 않는 죄, 그것을 사적으로 벌할 때에 그 수준을 과연 누가 정하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되면, 남편의 무능함에 질리고 불륜에 분노한 한 여자의 징벌이 명확히 남편의 "살해"를 향해있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이쯤되면 이미 파렴치한 불륜남이 꼬숩게 벌받는 권선징악 동화 따위가 아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법체계를 기만하고 의도적 살인을 저지른 소시오패스가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불륜을 논하는 건 논점 흐리기 밖에 안 된다.


여차저차 이야기는 막바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마녀의 수프통에 빠진 남자에게 마녀는 말한다. 당신이 진절머리를 내는 그게 결혼이라는 것이라고. 이게 공포.


여자가 정의 내린 결혼생활이라는 것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지 않더라도, 어쨌거나 성인으로서의 책임과 희생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것일진데, 그것을 해낼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채 몸만 자란 남자. 그리고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제거해버리거나 세상을 불타워서라도 자기 입맛에 맞게 교정해야만 하는 여자, 그 둘의 불온한 동거. 이 둘의 지리멸렬한 진흙탕 싸움이 상징하는 것이 다름 아닌 결혼생활이라는 개념 자체라는 사실이 영화의 이면에 깔려있는 진짜 공포의 실체다.


더 깊이 들어가볼까. 남자가 소시오패스 마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를 체념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어릴 적 겪은 아동학대 때문이다. 여자의 강박증적인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그녀가 어릴 때 그녀를 모델로 그녀의 부모가 집필한 동화책 때문이다. 학대 받는 아동이 학대 받을 당시에 느낄 공포 만큼 코즈믹 호러에 가까운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황색 미디어의 탐욕과 타인의 불행을 스낵처럼 즐기는 미디어 소비자들의 추태 역시, 미디어라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현대 사회를 사는 이들의 코즈믹 호러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전방위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공포"들"에 시달리는 남자, 유년기에 겪은 공포 때문에 새로 나타난 또 다른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이 기이한 팔자의 구조가 마지막 코즈믹 호러다.





연출 데이빗 핀처
각본 길리언 플린
원작 길리언 플린 (동명 소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