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포에버 Batman Forever (1995) by 멧가비


팀 버튼이 재창조한 조커와 펭귄이 각기 금주법 시대와 빅토리아 시대에서 온 듯한 시대착오 악당이었던 것과 달리, 이 영화의 리들러는 시리즈 최초의 과학 악당이다. 시리즈를 일신하려던 긍정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팀 버튼의 고딕 멜로는 애초에 흉내도 못 낸다며 한 발 물러서는 겸허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수준이 뚝 떨어진, 역시나 시리즈 최초로 돈 욕심을 내는 세속적인 주접 악당이 등장했으니 바로 투 페이스. 토미 리 존스의 투 페이스는 자타공인 언급할 가치도 없는 싸구려 양아치 갱 두목이지만, 그의 세력에 빌붙은 리들러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많은 가능성이 보인다.


오히려 현대에 시사하는 바가 더 많은 캐릭터다. 짐 캐리의 리들러는 코믹스와 달리 수수께끼 보다는 과학에 집착하는 인물. 그가 발명한 장치는 지금으로 치면 증강현실과 VR 시뮬레이터의 사이 쯤에 있는 물건인데, 리들러의 장치가 고담시 가가호호 입고되고 시민들이 장치에 홀려 일종의 집단 코마 상태에 빠지는 부분은, 배트맨 영화를 마치 사이버펑크 영화처럼 보이게 한다.


바보 상자를 진짜 바보 상자로 만들어버린 악당이라는 기괴한 컨셉의 사이버펑크 악당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가능성"은" 있었다는 말이다. 짐 캐리의 리들러는 여러가지 의미로 짐 캐리다. 좋게 보면 [케이블 가이]가 다크사이드에 빠져 타락한 버전 같기도 한데, 좋게 안 보면 그냥 언제나의 짐 캐리다. 특히 웨인 저택 습격 시퀀스에서는 저게 [에이스 벤추라]였던가 아니면 [마스크]였던가 가물가물해지는 뻔한 원맨쇼를 하고 자빠졌다. 물론 자신만의 캐릭터를 뚜렷이 가진 배우가 자신의 장기를 계속 갖고 가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짐 캐리의 마스크 연기는 사실 금세 질리는 면이 있었거든. 물론 이 영화에서 짐 캐리가 잘못한 건 없다. 어차피 그러라고 캐스팅한 걸테니.


그런가하면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 슈퍼히어로 영화이기도 하다. 마천루 펜트하우스에서 훝이불 덮고 자는 척 하면서 배트맨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장면. 어릴 적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건질 수 있었던 최고의 에로티시즘이다. 나는 이 장면이 슈마허 버전 배트맨 영화들에 오로지 게이 판타지만 있는 게 아니라는 증거라고 여긴다.


브루스 웨인에게는 멀쩡한 연인이 생기고 이야기는 어쨌거나 해피 엔딩으로 일단락 된다. 이 영화를 끝으로 삼부작인 채 마무리 지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언제나 든다. 그랬더라면 조엘 슈마허나 조지 클루니가 그토록 조롱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며, 배트 크레딧 카드를 보며 그저 부러워만 했던 어린 날의 내 자신을 떠올리며 자괴감을 느끼는 일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연출 조엘 슈마허
각본 리 배츨러, 아키바 골즈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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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블랙하트 2018/11/01 11:10 #

    '배트맨 포에버'는 원래 '배트맨과 로빈'으로 나올 예정이었었는데 서로 제목을 바꾼거라고 하더군요.
  • 멧가비 2018/11/02 12:44 #

    사실 그 쪽이 더 어울리죠. '포에버'라고 하면 꼭 완결편 제목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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