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과 로빈 Batman & Robin (1997) by 멧가비


영화가 조롱과 혹평의 욕받이가 된 이유들의 본질은, 팀 버튼 세계관의 연장선상인 척 하는 게 꼴보기 싫다는 거다. 어쩌면 배트맨 골수 팬들에게는 배트맨 유니버스가 매카시즘의 철퇴를 맞아 통째로 농담거리로 전락했던 흑역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일종의 어그로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알고보면"아담 웨스트 배트맨 쇼"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버전인 건데, 어쩌면 그 기회 자체가 시대를 잘 못 만난 거다. 차라리 슈퍼히어로 영화 과포화 상태인 지금이었으면 오히려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예 아담 웨스트 쇼의 비주얼을 그대로 작화로 옮긴 애니메이션 까지 나오는 시대이니 말이다.


어쨌든 "그런 기획이었다"고 인정할 거 인정하면 사실 그리 나쁜 영화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스튜디오의 무능함과 슈마허의 고집과 팀 버튼의 흔적이 묘하게 뒤섞였던 [배트맨 포에버]보다 장르적으로는 더 순수하다. 어쩌다 보니(비즈니스의 논리에 의해) 버튼 배트맨 시리즈와 같은 세계관으로 묶였지만, 어차피 주인공 배우도 다르니 팀 버튼의 배트맨 서사는 [배트맨 리턴즈]에서 끝났고 [배트맨 포에버]부터는 새로운 시리즈라고 간주하면 감상이 수월하다. 애초에 장르부터가 다르잖나. [배트맨 리턴즈]는 사실상 배트맨을 소재로 했을 뿐인 아트하우스 영화에 더 가까운 반면, 이 영화는 코미디를 적극 가미한 시즌 영화다. 레퍼런스가 배트맨이라는 것만 생각 안 하면 오히려 장점이 더 많은 한 편의 코믹 액션. 나도 한 때 이 영화 존나 깠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개봉했을 때는 기껏 재밌게 봐 놓고선 머리 좀 컸다고 나중에 딴 소리 하고 있는 거더라.


영화는 뚜렷하게 액션 파트와 코믹 파트로 구분 되는데, 액션 파트를 말하자면 벤 에플렉의 배트맨이 나타나기 이전까지 맨손 격투 액션이 제일 볼만한 배트맨 영화가 이 영화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코믹 파트는 슈월츠네거의 시그니처인 원 라이너 말장난이 적재적소에 쓰인다. (물론 내가 슈월츠네거를 워낙에 좋아해서 안 거슬렸는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이 영화의 기획 자체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기획대로는 착착 잘 만들어진 셈이다. 슈월츠네거의 어딘가 모르게 섬세한 면이 있는 철인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 미스터 프리즈의 재해석도 적절했다. 눈물이 흐르자마자 얼어서 흩어지는 씬이라든가, 탁상 시계를 분해해서 얼음 오르골로 개조하는 장면 등은 아름답기 까지 하다. 슈마허는 부당하게 혼자 모든 욕을 다 먹었지만 사실은 대형 스튜디오에 고용된 감독으로서, 주어진 각본을 연출로 만들어내는 작업 자체는 성실하게 잘 한 거다.


우마 서먼의 포이즌 아이비는 전작의 리들러를 계승하는 과학 계통 악당인데, 계통만 그렇다는 거고 본질은 우스꽝스러운 쫄쫄이 악당이다. 그런데 그걸 서먼의 연기와 타고난 분위기가 커버한다. 그 전 까지는 서먼 출연작들 중 내가 본 게 [바론의 대모험]이나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같은 것들 뿐이라 어딘가 멍한 구석이 있는 백치미 금발 미녀로만 기억했는데, 이 영화는 내게 팜므파탈 우마 서먼을 소개했다. [스타워즈] 세대가 아닌 사람들에게, 서먼의 포이즌 아이비는 캐리 피셔의 황금 비키니에 준하는 위치에 있다.


다만, 포이즌 아이비는 전작의 리들러와 마찬가지로 캐릭터가 정확히 뭘 어쩌고 싶은 건지 불분명하다. 슈마허의 두 배트맨 영화 단점이 그거다. 몇몇을 제외하면 캐릭터들 모두가 뭘 어쩌고 싶어서 저러는 건지 관객이 알 수가 없으며, 그 캐릭터들 자신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각본 단계의 문제이며 동시에 연출자 슈마허의 연기 지도가 부족했던 탓일 거다.


미스터 프리즈와 포이즌 아이비, 두 캐릭터 모두 배우에게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으나 영화가 추구하고자 하는 톤에 맞는 호연을 보여주고 있다. 코믹스 팬들을 실망시켰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굵직한 배우들 데려다가 낭비하진 않았다는 소리다. 그런 연기를 하라고 주문 받았는데 그런 연기를 존나 잘 해서 욕 먹은 것.



여기 까지 말하면 사실은 되게 좋은 영화인데 부당하게 욕 먹었단 소리 밖에 안 되지만, 그건 아니고, 어쨌든 한 편의 영화가 세기를 지나서도 두고 두고 욕을 먹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이 영화가 치명적인 나쁜 점은 전작의 시나리오 구조를 아무런 고민없이 그냥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참의 저택 입성과 팀 합류 과정, 웨인에게 앙심을 품는 미친 과학자, 기존의 거물 악당에게 접근해 주도권을 쥐려하는 지능형 악당 등등 전작의 염치없는 재탕이다. 미학적인 의도로서 패턴을 반복하고 변주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시나리오 개발을 건성으로 한 것, 그 차이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관객이 안다. 결국 배트걸-바바라는 고유의 캐릭터성 없이 그저 우마 서먼한테 주먹질할 사람이 하나 필요해서 고용된 짝퉁 로빈었던 거고.


조지 클루니에 대해서는, 전혀 칭찬할만한 캐스팅도 연기도 아니지만 굳이 비난할 거리도 없다. 전작에서 발 킬머가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고민을 끝냈기 때문에 여기서 클루니에게는 어떠한 개인 서사도 주어지지 않는다. 얻어 먹을 거 없는 밥상에 뛰어들어서 꼰대 역할이나 했을 뿐이다. 클루니의 잘못이라면 이 영화에 참여한 그 자체다.






연출 조엘 슈마허
각본 아키바 골즈먼

덧글

  • 블랙하트 2018/10/31 09:34 #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껏 캐스팅 해놓은 여배우들을 낭비하고 있다는거죠.

    브루스 웨인 애인 - 그냥 여자 사람. 하는거 없음.

    프리즈 여자 부하 - 출연 장면이 딱 한개.

    프리즈 마누라 - 영화 내내 계속 잠(...)
  • 멧가비 2018/10/31 21:40 #

    문제점 중 하나이긴 하겠죠
  • 닛코 2018/10/31 14:08 #

    미스터 프리즈를 주인공으로 했더라면 훨씬 나았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전체 시리즈 방향에 안 맞겠지만.
  • 멧가비 2018/10/31 21:35 #

    요즘이라면 정말 가능한 얘기겠죠.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