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1993) by 멧가비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설정. 이게 어릴 때 보는 거랑 어느 정도 인생을 알겠다 싶을 때 보는 거랑, 이제는 진짜 인생 뭔지 모르겠다 생각되는 순간에 보는 거랑 번번이 느낌이 다르다. 어릴 때는 그냥 존나 재미난 판타지 로맨스지. 성장기에는, 뉘우치니까 타임루프에서 빠져나갔다는 결말이 지루한 설교요, 뻔한 헐리웃 크리스마스 영화의 단골 테마처럼 느껴져서 우습다. 철없던 청춘에는 "오빠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라는 질문에 적절한 답을 찾아낼 때 까지 고통 받아야 하는 연애지옥처럼 느껴져서 영화의 장르가 호러로 바뀐다.


하루 안에 갇힌 필 코너스처럼 영화 안에 갇혀 스무 번 넘게 봤을 때 쯤 문득 든 생각. 매일 같은 날이 반복되고, 사람들의 행동, 말, 날씨, 공기 모든 것이 반복된다. 그 와중에 혼자만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대로 사고하고 인지하는 필 코너스. 그렇다면 과연 이 남자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채 뫼비우스의 띠 안에 갇혀버린 이 남자는 삶이라는 것을 살고 있는 걸까. 변화도 없고 인과(因果)도 없고, 쉽게 말해 앞 뒤가 없는, 그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이런 '숨 쉬고 있을 뿐인' 시간이 이 남자에게 있어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이 반복 안에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는 하는가.


이 남자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이 남자는 죽어 있는가. 숨을 쉬고 피가 흐르는데도?



필이 영문도 모른 채 타임루프에 빠진 것은 매사에 시큰둥하고 투덜대던 남자에게 내려진 벌 같은 게 아니다. 가만 보면 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저 필의 삶보다 시간을 선형적으로 멀쩡하게 지내고 있는 내 삶이 딱히 변화무쌍한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오면 영화는 또 다르다 이거지. 필의 타임루프는 더 이상 무언가에 도전하지 않고,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질려버린 모든 사람들의 평범한 나날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필에게 주어진 타임루프는 벌이 아니다. 염세적인 게 죄는 아니지 않나.


필은 어느 순간 그저 눈을 떴을 뿐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무언가에 불평하면서 하루하루를 소비하기 보다는, 매일 그저 주어질 뿐인 날들에 놓여진 유의미한 일들을 스스로 발견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영화 속 장면으로 예컨대, 필이 리타를 꼬시기 위해 불어 시를 아는 척 할 때와 그저 자기 스스로 음악이 좋아 신나게 즉흥 연주 할 때의 차이. 꼬셔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여자 앞에서 눈사람을 만들 때와,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을 하나 하나 외워서 얼음으로 조각할 때의 차이 같은 것들 말이다.


마지막 2월 2일 직전의 밤. 부랑자 할아버지도 마지막으로 필의 눈 앞에서 숨을 거둔다. 의미 없는 하루를 매일 아무렇게나 넘기던 필이 삶이 주는 의미 그 마지막 단계를 깨달았을 때, 필에게 내일로의 문이 열린다. 필의 타임루프는 시시프스의 고행 같은 것이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것을 연마하기 위해 주어진 수만번의 기회였던 것이다. 오히려 깨달음을 통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난다는 불교적 세계관에 가깝다면 가깝다고 봐야겠지.



짐 캐리에게 [트루먼 쇼]가 있었듯이, 빌 머레이에게는 이 영화가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소년과 청년들에게는 가지 말래서 안 간 여자, 앤디 맥도웰이 있었다. 열반에 들듯, 하루 동안 더 좋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성장 영화이자, 그 시절 가장 웃긴 남자였던 빌 머레이가 그 시절 가장 아름다웠던 여자 앤디 맥도웰을 꼬시는 과정을 지켜보는 관찰형 로맨스이기도 하다. 연애하는 영화는 통 안 보면서도 이 영화는 인생 영화로 꼽는 사람, 많을껄.







연출 각본 해럴드 래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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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직 여기 있어요?'
'당신이 있으라고 했으니까요.'

이렇게 로맨틱한 대사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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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포스21 2018/11/07 09:30 #

    흠, 한번 봐야겠군요
  • 멧가비 2018/11/07 21:30 #

    한번 쯤 봐야 할 영화라고 봅니다
  • Nachito volando 2018/11/07 11:26 #

    앤디 멕도웰이 있었죠....
    그러고 보니 그린카드도...
  • 멧가비 2018/11/07 21:30 #

    그린카드가 뭐예요?
  • Nachito volando 2018/11/07 21:32 #

    아...앤디 맥도웰이 사랑스러웠던 영화 제목입니다...
  • 멧가비 2018/11/08 03:03 #

    찾아보니 관심이 생기는데 로맨스 영화군요...아..
  • 로그온티어 2018/11/07 11:40 #

    그 소년들 중에 한 명이 바로 님이었군요

    늙었
  • 멧가비 2018/11/07 21:31 #

    이 블로그 방문자 연령 통계를 보면 거의 어버이연합이던데

    그 중 하나세요?
  • 콜타르맛양갱 2018/11/07 13:08 #

    진짜(?) 옛날에 티비에서 보여준거 같은대 재미있게 봐서 그런지 기억에 계속 남아있내요
  • 멧가비 2018/11/08 03:01 #

    90년대가 이제 "진짜 옛날"이군요. 슬프네요
  • izuminoa 2018/11/07 14:26 #

    이버트 조차도 평점을 번복한 영화죠..
  • 멧가비 2018/11/07 23:41 #

    그러고보니 그랬네요..아..할배..그립네요
  • 다담 2018/11/07 18:47 #

    글 참 맛깔나게 쓰시네요.
    잘 보고 갑니다. ^^
  • 멧가비 2018/11/07 21:33 #

    고맙습니다^
  • 듀얼콜렉터 2018/11/08 02:21 #

    정말 좋은 영화였죠, 앤디 멕도웰도 진리였구요 ㅎㅎ
  • 멧가비 2018/11/08 12:14 #

    지금 다시 봐도 좋습니다
  • 解明 2018/11/08 21:46 #

    시간의 감옥에 갇힌 필이 더는 버틸 수 없어서 마멋과 동귀어진하는 장면이 압권이지요.
  • 멧가비 2018/11/12 05:26 #

    그 지경에 이르는 과정도 아주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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