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프럼 어스 The Man From Earth (2007) by 멧가비


언제였는지 기억도 희미하지만 '바닐라' 사진을 처음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아이스크림 표준 맛 쯤 되는 그 바닐라 말이다. 말갛고 보드랍게 생겼을 줄 알았던 실제 바닐라는 시커먼 나뭇가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닐라라는 단어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장담컨대 백이면 백 아이스크림 색깔을 떠올릴 것이다. 이게 내가 일상에서 직접 체험한 최초의 "시뮬라크르"였다.


이 영화는 [블레이드 러너] 이상으로 시뮬라크르에 대한 이야기다. 장 보드리야르가 말 한 시뮬라크르, 간단히 말 해, 본질과 기호 사이의 헤게모니에 대한 관념이다. 본질을 흉내내어 기호화 된 가짜가 오히려 본질의 가치를 압도해버리는 현상, 쯤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주인공 존은 혈거인이다. 그러나 혈거인이 아니다. 우리가 혈거인이라 부르는 선사시대 인류군에 속해 있었으나, 그는 혈거인들과 같이 사라져 혈거인이란 이름으로 박제되는 대신 지금 까지 살아남아 현생 인류에 섞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혈거인이면서 동시에 혈거인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시뮬라크르 얘기를 하자. 존은 예수다. 영화 안에서의 설정이 그러하니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하거나 반론할 필요가 없겠다. 존은 예수다. 그러나 예수가 아니다. 적어도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 특정한 기호를 갖고 있는 자들에게 존은 예수일 수 없다. 예수는 종교라는 시스템 안에서 본질이 잊혀지고 기호화 됐기 때문이다.


현대에서 예수를 사유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예수이기 위해 갖춰야 하는 모종의 조건들이 관념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예수의 존재를 상품화, 기호화한 사람들이 만든 조건이지 본질의 예수가 본디 가졌던 것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존은 그 본질이 예수이지만 예수라는 기호만 가진 사람들에게는 예수로 인정받지 못하고 예수라는 이름을 허락받지 못한다. 호부호형 못하는 것도 빡치는데 자기 자신을 인정받지 못하면 얼마나 빡돌 거야 세상에.


신앙이라는 것의 매커니즘이 나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감이 인식하지 않는 무형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것의 본질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정말로 믿는 게 아니라, 믿는다는 형태의 정신활동을 그 정신활동의 주체가 원하고 있을 뿐인 거다. 즉, 정말로 믿어져서 믿는 게 아닌, 무언가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뇌활동에 의존한다는 거지.


때문에 진짜 예수는 예수를 믿는 자들 곁으로 돌아와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진짜 예수를 알고 믿는 게 아니라, 예수라는 형태의 기호, 기호로서의 예수를 중심으로 지탱되는 종교 시스템, 그 시스템과 집단 안에서 보호 받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믿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예수를 영접하는 일보다, 수 백년 간 지켜 온 허구의 신과 그 거짓 성전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해버린 것. 이거야 말로 가장 오랜 역사와 스케일을 자랑하는 시뮬라크르가 아니겠나.


그러나 어쩌면 삶과 만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보다, 종교라는 필터를 통해 자신이 내키는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편안함을 더 보장한다면 그 역시 종교의 순기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존과 논리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비종교인으로서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연출 리처드 섄크먼
각본 제롬 빅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