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첩보국 The Ipcress File (1965) by 멧가비


재미있는 건, 이 미니멀하고 냉소적인 에스피오나지 영화가 느끼한 로망으로 가득했던 '007 시리즈'와 같은 제작자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젓지 않은 마티니를 손에 들고 거드름을 피우는 대신, 직접 내린 원두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출근하는 소시민적 영국 첩보원 해리 파머가 그 주인공.


멋진 슈퍼 자동차도, 주인공을 위해 순정과 목숨을 바칠 육체파 미녀도 없지만 어쨌든 주인공 해리는 맡은 바 첩보 임무에(최대한 시큰둥한 얼굴로) 충실히 임한다. 그게 직업이고 시대가 그런 시대니까.물론 정체불명의 적성국과 악당 암살자 등이 등장하는 시점에서 이미 이쪽도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냥 007과 같은 세계관의 다른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을 정도인데, 다만 007의 안티테제로 기억될 수 있는 이유는, 해리 파머에게는 느끼한 나르시시즘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세상 귀찮고 성가신 일 좀 안 생겼으면 좋겠다는 저 얼굴 어디에서도 "냉전 시대를 휘젓는 슈퍼 스파이라는 캐릭터에 취한" 자뻑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기에는 임무도 불투명하고 직장 상사들은 냉전 시대 제 3세계에서 바라보던 미소 관계처럼 어느 쪽도 믿을 수가 없다. 자뻑은 천성이라지만,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뻑이 가든 뭐가 가든 하는 법.


후속작 두 편이 더 나왔다. 영원한 007인 숀 코네리와 달리 마이클 케인은 요즘 관객들에게는 '알프레드'로 더 기억된다. 007 시리즈처럼 장수하지 못한 이유? 추측컨대 간단하다. 엔터테인먼트가 필요 이상으로 부족하니까. 세상도 하수상한데 스파이 영화 주인공도 관객이랑 똑같이 불안해하고 있는 쪽과, 적성국 악당 궁뎅이를 걷어 차며 "우리가 정의"라고 확신을 주는 쪽. 어느 쪽이 관객에게 사랑 받을지는 뻔한 일이지.






연출 시드니 J. 퓨리
각본 제임스 도런


덧글

  • 로그온티어 2018/12/30 21:54 #

    저는, 어느 쪽이 사랑받느냐가 아니라 시대가 바라는 바가 흥행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날은 명확하게 선과 악이 갈리는 게 좋고 납득가는 시절이 있는 한편, 어느 날은 불신이 팽배해서 오히려 선과 악이 불분명한 것이 더 공감되고 받아 들여지는 시절이 있는 것 뿐이죠. 혹은 명료하게 악을 제거하는 게 받아들여지는 날이 있는 가 하면, 어느날은 그게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고.
  • 멧가비 2019/01/06 02:46 #

    관객에게 사랑받는다, 시대가 바란다. 이거 같은 얘기를 그냥 다르게 한 거 아니에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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